뒤집어 본 역사 : 「고사기(古史記)/ 일본서기(日本書記)」 그리고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역사를 날조하는 나라, 일본(2)

이홍환 한국 땅이름학회 부회장
국학연구소 이사장

일본이 역사를 날조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뒤에는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고 하는 날조 전문가가 있었다. 후지무라는 지금까지 호카이도(北海島)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板)와 미야키(宮城)현의 가미타카모리(上高森)유적 등 두 곳을 비롯하여 20곳이나 일본의 구석기 유적지를 날조, 조작 그들의 교과서와 사서에 옮긴것으로 나타나 세계 사학계에 큰 충격을 준 것이 불과 2001 10월의 일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중기구석기(3~13만년전)유적으로 평가받아 온 이와테(岩手)현 이와이즈미초(岩畓町)의 효탄(瓢簞)동굴 유적이 날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부터다. 고고학협회는 ‘유적지의 지층이 석탄이 묻어 나오게 돼 있으나 해당유물에서 석탄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데다 부자연스럽게 불로 가공한 흔적이 들어났다’며 날조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역사를 위조하는 나라

우리나라 사서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은 1145(고려 인종 23)에 발간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내용과 일자가 정확하고 전개가 과학적이라 우리 역사의 기본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는 당시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편찬자들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그때까지 전해져오던 많은 문헌 즉 「삼국사기(三國史記), 「해동고기(海東古記)」 등 국내 사서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晋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등 여러 사서도 함께 참고하여 썼기 때문이다. 이보다 140년쯤 뒤인 1281~1283년간에 나온 「삼국유사(三國遺史)」는 정사인 삼국사기를 보완하는 야사(野史)의 성격으로 승 일연(一然) 혼자의 힘으로 쓰여져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사료와 설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최초의 사서로 「고사기(古史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서기 712년 태안만려(太安萬呂)에 의해 만들어졌다. 저자인 만려는 원래 안만여(安萬呂) 라는 후백제의 유민으로 일본에 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보다 8년 뒤에 쓰여진 「일본서기(日本書記)」라는 것은 분량으로 보아 「고사기」가 3권인데 비해 「일본서기」는 무려 30권으로 상당히 많은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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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주와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할 당시에 찍은 광개토대왕비(우)와 비문(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일본의 역사서는 한마디로 허황된 역사날조로 일관되어 있다. 그 주류는 당시 한국대륙의 삼국, 신라, 고구려, 백제 특히 신라에 대한 비하와 모욕, 그리고 일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조작된 내용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첫째 일본은 서기전 660년에 건국하여, 그때 1대 천황이 즉위한 이래 지금까지 만세일계(萬世一系)로 내려오고 있다. 둘째, 서기 200년에 일본의 신공(信功)황후라는 걸출한 여걸이 있어, 신라와 가야를 정벌하였다는 이른바 임라부설을 내세우고 있다. 이르기를 「신라왕은 신공의 군대가 바다위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지레 겁이 나서 백기를 둔 채 스스로 몸을 결박하여 해변으로 나와 머리를 땅에 박고 지도(地圖)와 호적을 바치며, 앞으로 영구히 마사부(馬飼部: 말먹이 직)가 되어 봄, 가을로 말빗과 말채찍을 함께 조공하겠으며 해마다 남녀를 바치겠나이다 하여 신공은 이를 수락, 신라왕을 마사부로 삼고, 왕도에 들어가 금은보화를 80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개선했다. 이를 전해들은 백제왕과 고구려왕도 스스로 영문앞에 나와 앞으로 영구히 서번(西蕃:서쪽의 오랑캐)이 되어 조공을 계속하겠나이다.」하였다. 셋째는 아직도 일본이 굳게 믿고 이따금 떠벌리는 임라본부(任那本部)설이다 이들이 떠드는 임라부설이란 「서기 전 32 10대 숭신천황때, 임라국이 조공을 했다. 서기 전 28 11대 수인천황때 가락국 왕자가 왔다가 돌아갈 때 수인이 너희가 사모하는 수신천황의 이름이 미마끼(御問城)이니 너희 나라 이름을 미마나로 하라고 하여 대가락국의 국호를 미마나, 즉 임라로 하였으며, 서기 294년 응신(應信)천황 때는 왜의 사람인 목만치(木滿致)가 임라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뒤 서기 562년에는 임라국의 여러 왕들이 임라의 길비신(吉備神)과 함께 백제의 성왕(聖王)에게 가서, 천황의 조서를 앞에 놓고 어떻게 하면 임라를 재건하겠는가. 신라가 방해하니 천황의 힘을 빌리고자 어전회의(御前會儀)를 하였다」고 되어있다.

image이상과 같이 일본학계에서 철썩같이 믿어온 한·일고대사로써 첫째, 일본역사는 서기 전 660년에 벌써 천황이 즉위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하여 1940년에는 이른바 「기원 2600년」이라 하여 대대적인 축제행사를 떠벌린 일은 오늘의 60대 후반 세대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사학자 대부분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일뿐, 사실 작으나마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춰, 천황이 즉위한 것은 4세기 경으로 한참 내려와 응신(應信)천황부터가 실제 인물로 보고 있다. 그 앞의 일천년 동안의 것은 가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서기 전 660년이라면 중국은 전설상의 주()나라 시대이고 우리나라는 단군왕검에 의한 신정시대(神政時代)가 아닌가!

두번째 이야기는 연대는 몇 백년식 오락가락하지만 그래서 정사(正史)로 세계가 인정하는 삼국사기의 연대와 맞지않자, 오히려 삼국사기가 날조되었다고 우겨대는 일본의 우익학자도 있다. ()의 신라 정벌이 10여차례나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는…, 이것은 당시 규수(九州)지방에 있던 작은 부족국의 해적들이 한국대륙 연안을 노략질한 왜구들의 소행을 과장하여 써놓은 것일 것이다. 세번째는 오늘날까지도 한·일간에 어느 부분은 논쟁이 붙어 있는 상태로써, 즉 일본은 「고사기, 일본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서기전 28년경부터 가야가 신라에 망한 서기 562년까지 근 600년간 한국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특히 1877년 만주 즙안에서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면서 부터는 한발짝 후퇴하여 그 비문에 나와 있는 서기 391년경부터 서기 592년까지 200여년 동안은 확실히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의 남부에 「임라본부」를 두어 속지로 삼았으므로 35년간 한국을 식민지화 한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 영토를 되찾은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서기 414, 당시 고구려 왕도인 즙안(輯安)에 세워졌으나, 서기 668년 고구려가 신라, 당나라 연합군에게 망하자 그곳은 폐허로 변했다.

높이 6m인 거대한 이 비석은 잡초더미 속에 묻힌 채, 1,200여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그로부터 19세기말, 만주 침략을 위해 이곳에 파견된 일본군 육군참모부소속 사카마가 가게노부(酒句景信) 중위가 발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일본 사학계는 역사적 대발견이라며 흥분했다. 사카마가 가게노부 중위가 떠온 비문 중에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라 쓰여 있어서, 이것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가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광개토대왕비문은 발견 당시에 오랜 세월의 풍우에 너무 마모되어, 그 당시 기술로는 탁본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카마가 가게노부 중위는 비석 네면 전체에 두깨 2cm의 횟가루를 바르고 보잘것 없는 자기 한자실력에 맞추어 희미한 글자획을 새겨넣고 탁본했음이 최근에야 드러났다.

설사 원문이 맞다손 치더라고 비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이기 때문에 「왜가 신묘년에 쳐들어 왔기에 (백제를 후원하기 위하여) 왕이 바다(황해)를 건너가 백제, 임라, 가야 등을 복속시켰다」고 해석해야 마땅한 것이거늘, 일본식 해석은 문장의 구조나 당시 한국대륙의 정세로 보아 앞뒤가 안맞는 그야말로 허구로 날조된 「고사기, 일본서기」의 방증자료로 꿰맞추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고사기, 일본서기」는 신라에 원한을 품은 후백제의 망명객이 일본에 귀화, 성까지 갈면서 원수의 나라 신라에 대해 갖은 모욕으로 일본의 비위를 맞춰가며 조작한 한갖 소설책 수준에도 못미치는 책이다.

오늘날까지도 이 책의 300여 곳은 일본학자들이 해석하지 못하고 그저 추측적으로 떠들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이두식 한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만이 해석이 가능하다.

「임라일본부」설을 실증하기 위해 또 일본학계가 오래전부터 김해, 고령 등 옛 가락국 터에서 일본의 흔적을 찾으려 헤메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다가 최근 철금속 광맥이 다량 매장된 고령지방에서 신석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훌륭한 도검류가 무더기로 발굴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가락국에 인접한 일본 규수지방의 부족국들이 오히려 가라국의 분국이었음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최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나 후지무라 신이치 같은 간교한 역사유물 조작사건은 그들의 역사날조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족의 역사를 일천년씩 또는 70만년식 왜곡하는 일본인들의 왜곡 속성은 이미 4세기경부터 있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