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석유협회보 2018년 가을호 역사인물 가상인터뷰>
조선의 모든 여인들에게 자유와 개조를.
-작가 겸 승려 김일엽의 행복과 불행의 갈피.
“……무엇무엇 할 것 없이 통틀어 사회를 개조하여야 하겠습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가정의 주인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도 남같이 살려면,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면, 남답게 살려면 전부를 개조하려면 여자 먼저 해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위 글은 1920년 3월에 이화학당이 경제적 지원을 하고, 이화학당 출신 신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발행한 『신여자』 중 문인 겸 승려 김일엽(金一葉: 1896∼1971)이 남긴 창간사 중 일부입니다. 이때 그녀는 승려가 아니었고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지요, 여성인권의 불모지 조선에서 강렬하고 가열차게 여성 해방운동의 한 획을 그은 김일엽은 사실 문학사적인 평가보다 당대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과의 개인적인 스캔들과 파격적인 사생활로 더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일엽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살펴보면, 조선 여성들의 인권과 가정 및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사회운동을 펼쳤던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代母) 격입니다. 앞서 언급된 나혜석과 윤심덕, 최영숙 등 당대의 신여성들이 남성중심사회의 단단하고 높은 유리벽에 부딪쳐 쓸쓸히 스러져간 것과는 달리 김일엽은 이에 꿋꿋이 맞서 극복했던 ‘무소’ 같은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김일엽이 남긴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 또한 우리 근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업적이었습니다. 특히 1907년, 그녀가 열두 살 때 집필한 동생을 잃은 슬픔을 표현한 시 「동생의 죽음」은 육당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앞서 쓰인 국문 자유시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 김일엽 작가를 소환해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천애고아, 이혼을 하고 일본으로 떠나다.
인터뷰어 : 안녕하세요. 김일엽 작가님.
김일엽 : 반갑소. 중생들이 나를 소환한다기에 가슴 설레며 이리 냉큼 달려왔소.
인터뷰어 : 작가님의 인생을 살펴보면 한 편의 영화처럼 파격적이고 파란만장하더군요. 조실부모와 잘못된 결혼, 이때부터 여권운동에 관심, 남편과의 이혼, 일본 유학, 일본 명문가의 아들과의 열애, 집안의 반대로 사생아 출산, 모든 걸 버리고 귀국해 본격적으로 작가와 사회 운동가로 활동, 이후 몇몇 명사와의 스캔들. 종국에는 탈속하여 불교로의 귀의, 승려로서 그토록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에 마침표를 찍으셨어요.
김일엽 : 불교에 ‘윤회’라는 말이 있지요. 내 업보가 그만큼 많았던 탓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본래 불자가 아니었소. 나의 부친이 목사였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 우리 부모님은 종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개화한 분들이었소. 아버지는 향교의 향장을 하신 지식인이자 목사셨소. 5대 독자인 아버지가 결혼 6년 만에 얻은 귀하디 귀한 자식이 바로 나였소. 해서 보통 다른 집 딸자식들과 달리 귀염과 기대를 독차지하며 자랐소. 일찍 개화한 부모님은 딸자식도 교육의 기회를 똑같이 줘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집과 땅을 팔아서라도 나를 대학교에 보내 남자들 못지않게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우실 각오도 하셨고요. 어린 시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와 근대교육이었소. 딸자식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아들 중심, 남성 중심적 사회분위기에서 소학교 문 앞에도 가기 어렵던 당대 여성들과는 달리, 개화한 부모님 밑에서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내 생애에 있어 가장 큰 행운이었소. 어릴 적 꿈은 전도부인이었소.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들을 구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적도 있을 만큼 신앙심이 깊었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가난한 살림살이 탓에 어머니가 벌이를 나가면 아직 어린 내가 갓 난 동생들을 돌봐야했고, 내가 시로도 남겼던 열두 살 때에는 바로 아래 동생이 병으로 죽고, 연이어 세 동생과 부모님마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어 내 나이 열일곱에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소. 그때부터 기독교에 대해 회의를 가졌고, 불교에 귀의하기까지 무신론자로 지냈소. 가난과 고독은 어린 시절 나를 가장 힘겹게 했고, 철이 일찍 들게 했지요. 그래도 외할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때문에 경성(현 서울)으로 와서 이화학당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소.
인터뷰어: 앞서 소개글에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화학당 출신 신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발행한 『신여자』의 창간사에 그러한 글을 쓰기도 하셨고, 반평생 가까이 여성의 권익 향상에 적극 참여하셨죠?
김일엽 : 예. 어릴 적부터 그쪽 방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부모들이 아무리 없는 살림이어도 아들은 공부를 시키고 학교에 보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클 때에 딸자식들은 학교 대신 부엌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초경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후면 부모가 짝 맞춰준 집안으로 시집을 가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했소. 남편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일률적으로 정조와 순종을 강요당했소. ‘사랑’이 기본이념인 기독교에서조차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로 여성을 비하하곤 하죠. 나는 그런 모욕적인 취급을 받으려고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다른 여성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여건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마는, 여성과 남성은 뭐 하나 다를 게 없는 똑같은 감정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철저히 독립이 불가능한 인형 취급을 받아왔어요. 나는 바로 그런 가부장적인 사회 인습에 반기를 들었소.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고, 여성은 남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고 부르짖었소. 내가 살던 당시 근대 교육을 받은 소위 ‘신여성’이라 하는 여성들은 허영에 들뜬 여성의 대명사로 낙인됐소. 친구 나혜석이 그랬고, 윤심덕과 김명순도 그렇게 외면받아 스러져갔소. ‘자유연애‘를 외쳤을 뿐인데, ‘탕녀’로 매도되던 시대였소. 남자들은 첩을 몇씩 집안에 들이고, 요릿집 기생들과도 그리 방탕하게 지내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고, 남자니까 그것이 당연시 되던 때였소. 나는 그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소.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하면서 남자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는 게.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특권과 면죄부를 부여하는 건 매우 잘못되고 부당한 처사요.
해서 나는 남성들과 똑같이 자유연애를 하며 인습을 비웃었소. 몸소 우리 여성들도 연애를 이렇게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소. 나 역시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였기에 내가 먼저 실천했던 거요. 진정한 정조는 육체적인 순결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거요. 천상과부열녀문은 남자들이 만든 판타지일 뿐이오. 내가 주장하는 ‘정조’란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여인의 진정한 사랑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정조를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이오.
● 청춘을 불사르고 결국 국화꽃이 되다.
인터뷰어 : 작가님 또한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신가요? 혹시 연희전문대학 이노익교수와의 첫 결혼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김일엽 : 예 그렇소. 내 나이 스물두살에 마흔 살인 전남편 이노익씨와 결혼이라는 걸 했소. 그는 미국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와 연희전문대학 화학과 교수로 내정되었는데 다리가 불편했어요. 그의 콤플렉스 같은 건 이해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어린 시절부터 너무 외로워서 무엇보다 안정적인 울타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혼을 쉽게 결정했어요. 그런데 서로 성격차이로 인한 심적 고통이 너무 커 결혼의 허상을 깨달았어요. 결국 『신여자』 동인지 활동 이후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결혼한 지 4년만인 1921년에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리고 나는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인터뷰어 : 작가님에게는 가장 가슴 아리는 상처가 아닐까, 싶은데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격정어린 사랑을 하셨지요?
김일엽 : 내가 일본 영화학교에 재학 중일 때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어요. 그는 규슈 제국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대화가 잘 통해서 우리는 곧 친해졌어요. 첫 결혼 상대와는 달리 필이 통했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래서 사랑이란 걸 했소. 근데 알고 보니, 이 사람 집안이 어마어마했소. 할아버지는 에도시대의 명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 일본을 통일한 명장이었고, 아버지는 시중은행의 총재였소. 오다 가문은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였는데 식민지 조선 여인을 며느리로 받아줄 리가 있겠소? 조센징 여자, 게다가 장애인 남편을 버린 건방진 여인을 며느리로 받아주는 건 가문의 수치라며 그 대단한 집안에서 극구 반대를 했죠. 그 때 나는 아이를 잉태 중이었는데, 결국 그 아이도 그의 친구 집에서 낳는, 여인으로서 수모를 겪었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그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고, 나는 그에 대한 기대를 버렸지요. 해서 ‘당신이랑 함께 살면 내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라’는 편지를 남기고서 조선으로 혼자 돌아와 버렸소. 그랬더니 그 바보 같은 남자가 나를 못 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혼자 살았다는군요. 오다 가문과도 이절하고, 아이는 조선인의 집 양자로 입적시키고.
인터뷰어 : 그 아이가 김태신 화백, 즉 일당스님인가요?
김일엽 : 그렇소. 사실 그 아이에게는 많이 미안해요. 어미로서 한번도 품어주질 못했으니까. 나는 참 나쁜 어미였소. 세상 어느 누구도 내 심정을 알지 못할 거요. 부처님 빼고. 부처님이 속세에 둔 아들의 이름이 ‘라훌라’였어요. 라훌라는 ‘애물’이라는 뜻의 범어이기도 한데, 부처가 출가하여 수도할 때 아들이 태어나자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나 역시 그 아이가 ‘라훌라’ 같은 의미였어요. 조선에 돌아와 백성육과 허윤실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동거를 하면서 불교 교리에 심취, 내 나이 서른세 살에 모든 정념을 끊고 불교에 귀의했소. 수덕사에 있을 때, 그 아이가 나를 어미라고 찾아왔소. 내심 반가웠지만 속세와의 인연을 뿌리쳐야 하는 내가 그 아이를 어미라며 품에 안을 수는 없었소, 해서 그 아이에게 나를 어미라 부르지 말라며 매정하게 등을 떠밀어 수덕여관으로 내려 보냈소. 속으로는 피눈물이 났지만 비구니가 된 어미는 차라리 없는 게 낫소. 그 때 마침 수덕여관에 친구 나혜석이 기거하고 있었소. 나혜석도 나와 비슷한 처지였으니 제 아이들 생각에 우리 태신이를 다정히 맞아주었소. 화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다가 내 영향을 받았는지 나이 육십줄에 그 아이도 출가를 했소.
인터뷰어 : 작가님이 생각하는 ‘정조’에 관해 정리해 주신다면?
김일엽 : 내가 살던 때에는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했었소.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된 것처럼 큰 흠으로 여겼소.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서로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정조란 상대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하는 것이지, 그 사랑이 식으면 정조 개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생전에 주장했던 정조관입니다.
인터뷰어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글 : 홍지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