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단축과 정유업계 영향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 김영완
획일적 근로시간 단축의 우려
육·해·공군은 각자 싸우는 방법과 장소가 다르다. 제각각인 임무수행 환경을 고려해 서로 다른 전투복을 입는다.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똑같은 전투복을 입고 전쟁을 치르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활동이 어려워져 전투력이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다. 글로벌 산업계도 전쟁터 못지않게 연일 소리 없는 총성이 오간다. 정부와 국민들은 경제전쟁에 나서는 산업 일꾼들의 승전보를 기대한다. 그런데 맞지 않는 전투복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 보이는 기업들이 있다. 획일적 노동규제에 둘러싸인 우리 기업들이다.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한 근로시간 단축법이 7월부터 시행됐다. 우리 기업의 근로시간은 1주 최대 52시간으로 제한됐다.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규모별로 3단계에 걸쳐 시행된다. 오랜 기간 대법원 판결과 입법의 지연에 따른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근로시간을 줄여서라도 일자리를 늘려 보자는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의 연착륙 방안을 면밀히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적용은 제도화하지도 못한 채 개선 논의 자체를 2022년 12월까지 미뤘다.
‘공휴일 유급화’, ‘특례업종 5개로 축소’ 등도 상당한 문제점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주휴일을 유급으로 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와 터키가 유일하다. 게다가 휴일근로 50%의 가산할증률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공휴일까지 법정 유급휴일로 부여한다면 최저임금의 고율 인상과 더불어 인건비 부담이 과도해진다. 근로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 특례업종은 2015년 노사정 합의 당시 26개에서 10개로 축소하는데 의견을 모았으나 이번 개정에서는 5개 업종이 더 줄어들었다. 특례에서 제외된 업종이 소비자 중심의 주문형·대기형 서비스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용자가 임의로 근로시간을 조정할 여지는 작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의 불편도 예상된다.
무엇보다 산업·직군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규제라는 점이 우려된다. 정유, 반도체, 조선, 철강, 자동차 등 업종 마다 생산방식과 근무형태가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을 주문했다. 근로시간 총량은 줄이되 각 업종의 특성별로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제도를 여는 것이 맞다. 기업이 맞는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을 수 있도록 제도의 폭을 넓히자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는 획일화된 제도를 강제로 입히고 있는 실정이니 세계무대에서의 어려움은 불 보듯 뻔하다.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의 노동문제 전문가인 도미니크 그롤 박사는 최근 “임금과 근로시간을 법으로 획일적으로 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다. 독일은 이른바 ‘하르츠 개혁’을 통해 노동시장을 유연화 해 실업률 감소와 고용률 증가를 실현했다. 고용률은 2005년 65.5%에서 2016년 74.1%까지 상승했고, 실업률은 11.2%에서 4.1%로 떨어졌다. 청년실업률(15~24세)은 이 기간 15.6%에서 7.1%로 절반 이상으로 떨어졌다.
정유업계의 영향과 정부의 역할
근로시간 단축으로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는 곳 중 하나가 정유업계다. 정유업계는 지난 수 십 년간 안정적인 석유 공급으로 산업화를 이끌고 있으며, 수출 효자종목으로서 우리 경제를 튼튼히 받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서 국가 간 무역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국제유가 상승에 따라 전망도 어두운 현실이다. 이미 올해 1분기 정유업계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10 ~ 50% 감소했다. 여기에 근로시간 단축 등 노동 관련 이슈들로 인해 더욱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유업계 특성에 맞는 근로시간 설계가 시급한데도 현행 유연근로제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도입절차가 까다롭고 단위기간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유업계는 어떻게든 근로시간을 맞추려 애쓰고 있다. 우리 정유사들도 야근을 전면 금지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검토·도입하고 있다. 현장 엔지니어와 사무직을 대상으로 PC-OFF제를 시범 도입하거나, 2주 동안 80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인타임 패키지'를 시행하는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교대제 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은 단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대정비 작업(Turn Around)과 같은 대규모 유지·보수 작업을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온다.
발화성 물질을 다루는 석유화학업종에서는 잠깐의 실수로 대규모 화재와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 공장을 고장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정비 작업이 필수적이다. 대정비 작업은 산업안전보건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에 근거해 시행되는 것이며, 3~5년 주기로 수개월에 걸쳐 진행된다. 시설의 가동을 멈추고 시설해체, 장비점검, 청소, 설계변경, 용량증대 등의 작업을 하기 때문에 다수 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투입돼야한다. 따라서 상당한 근로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집중도 높은 작업이 이뤄질 수 없으며, 전문적인 대체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연장근로가 불가피하다. 근로시간 단축을 이유로 숙련인력이 투입되지 않거나 비숙련 인력이 일시적으로 투입될 경우 안전사고의 위험은 높아지게 된다. 근로시간 단축은 필연적으로 작업의 지연으로 귀결되며, 경제적 손실도 상당하다. 산업과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한 결과 발생할 부작용이다.
방법은 없는 걸까? 당장에는 근로기준법 시행규칙의 개정을 통해 해법을 모색해볼 수 있다. 근로기준법 제53조 제3항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와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이하, ‘인가연장근로’). 다만, 근로기준법 시행규칙 제9조에서 위의 ‘특별한 사정’을 ‘자연재해와 재난으로 인해 연장근로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다. 본 규정의 확대적용을 통해 정유업계 등 장치산업에 인가연장근로를 허용한다면 근로시간 단축의 충격을 일정부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가연장근로는 고용노동부 장관이 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신속한 적용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법 개정을 통해 탄력적 근로시간제 개정 논의도 서둘러야 한다. 개정법 부칙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 등 개선 방안을 강구토록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행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단위기간이 2주 또는 3개월에 불과하고, 선택적 근로시간제 역시 1개월 이내로 제한돼 있어 기업들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단위기간을 1년으로 확대하는 제도개선이 조속히 이뤄져야 성공적인 근로시간 단축의 연착륙도 가능하다.
법 시행과 관련해 계도 기간을 운영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개정법 위반 시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2년 이하의 징역 처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법이 현장에 안착하려면 최소 6개월 정도의 계도 기간이 필요한데, 정부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기업 신규 채용이 연말·연초에 집중돼 있고, 능력 있는 인재 선발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정유업계의 대정비 작업의 경우 숙련된 인력 수급이 산업안전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각 업종별로 맞춤형 근로시간제를 설계하도록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으로는 세계무대에서 경쟁이 어렵다. 앞서 제시한 여러 제도개선과 함께 산업현장의 연착륙 방안을 적극 고려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