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석유협회보 2018년 여름호 역사인물 가상인터뷰> 편집본.

 

조국을 위해 던져진 촛불

--한국 최초의 여성경제학사, 최영숙

 

이번 호에도 여성 인권의 불모지 조선에서 안타까이 스러져간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개화기, 즉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른바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의 삶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요. 이전의 어머니의 삶과는 확연히 다른, 배울 만큼 배웠고 자유연애관과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그녀들은, 그러나 여전히 두텁고 강한 남성우월사상, 특히 엘리트 여성들에 배타적인 남성 중심적 사회에 무참히 부딪쳐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은 제 풀에 지쳐 아무개의 첩으로 사는 것으로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다른 부류의 여성들은 남자들만의 세상에 반기를 들며 진취적인 사명감으로 비상을 꿈꾸었지만 끝내 얼마 날지도 못한 채 시대의 벽에 부딪쳐 추락하고 말았지요.

다름에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사회에서 그들은 신여성이기에 불행했습니다. 그 중, 가장 특별했으나, 어쩌면 그 특별함 때문에 오히려 더욱 불행했던 한 비운의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최영숙(1906~1932). 한국 최초의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출신 경제학사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최영숙 선생님을 소환하여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을 졸업하게 된 계기와 귀국 후 조국에서 겪은 고초 등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빛과 소금이 되고팠던 한 소녀의 꿈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최영숙 선생님.

최영숙 : 안녕하세요. 최영숙입니다. 반갑습니다.

인터뷰어 : 선생님의 스물일곱 해의 짧은 일생을 되짚어보면 한 자루의 촛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멋지고, 경이롭고, 그러면서도 참 많이 안타깝고요. ‘파란만장이란 단어밖에 안 떠오릅니다.

최영숙 : 어릴적에는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수재로 통했지만, 결국 내 최종 직업은 미나리, 콩나물 파는 구멍가게 야채 장수였어요. 직업에 귀천도 없고 야채장수가 나쁜 직업이란 뜻이 아니라 이 나라는 5개국 능통자,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조차 발붙일 곳이 없어서 구멍가게 야채장수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묘한 재주를 부리더란 말입니다. 내가 지난 날 겪은 고초에는 여자라는것도, 또한 식민지 조선의 여자라는 이유도 얼마간 포함됐을 거요.

인터뷰어 : 당대 보기 드문 해외 유학파셨어요.

최영숙 : 당시 엘리트들은 일본 유학파가 태반이었지요. 나는 동양인으로서도 최초로 스톡홀름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러다보니 그 곳 사람들이 저를 신기하게 여겨 과잉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요.

인터뷰어 :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한 나라였을 텐데 스웨덴에서 유학을 하기로 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최영숙 : 스웨덴의 저명한 여권운동가 겸 사상가였던 엘렌커이를 만나야 한다는 열의 하나로 가치관과 신념이 비슷한 중국인 친구와 함께 스웨덴 행을 결행했지요. 엘렌케이는 주활동무대였던 서구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1910~20년대 일본과 중국, 조선 등 동아시아의 자유연애와 여성운동은 그의 사상과 이념에 뿌리를 두었지요. 그의 저서들 중연애와 결혼,연애와 윤리는 당대 신여성의 필독서였어요. 나 역시 중국 난징에서 학교를 다닐 때 엘렌 케이의 저서들을 접하고 감회를 받아 그를 만나고 싶다는 맘 하나로 시베리아 횡단열차까지 타고 스웨덴으로 무작정 달러갔지요. 그러나 나는 그녀와 조우할 수 없었어요. 내가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석달 전,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까요.

인터뷰어 : 선생님은 영어일본어중국어독일어스웨덴어까지 총 5개 국어 능통자로서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이화학당을 졸업하신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 하셨습니다. 특별한 동기가 있으십니까?

최영숙 : 후대에 그런 말이 있다지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라고. 나는 경기도 여주의 한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포목상을 해서 돈을 좀 벌긴 했지만, 그리 큰 부자는 아니었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총명해서 집안 어른들이 딸로 태어난 게 아깝다 했을 정도였지요. 일곱 살에 여주보통학교에 입학해 열한 살에 졸업했는데 너무 일찍 졸업해 3년을 집에서 놀면서 보냈어요. 당시에는 열네살이 돼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열네살이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났죠. 우리 부모님도 당시 보통 부모들처럼 계집이 보통학교 정도만 졸업했으면 됐지 공부를 더 해서 뭐하냐는 완고한 생각이셨어요. 하지만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여자라고 해서 공부를 못하게 한다는 건 뭔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요. 해서 백일기도를 드리며 완고한 부모를 설득했고, 가까스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경성으로 상경, 이화학당에 입학했어요. 3·1운동 직후라서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했지요. 1년 선배가 유관순이었는데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고, 다수의 교사와 학생들이 잡혀가 투옥됐거나 목숨을 잃었어요. 그 때 깨달았어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1923년 이화학당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나서 제 나머지 생을 조선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인터뷰어 : 그럼 그 때 안창호선생과 같은 독립투사들과 조우하신 겁니까?

최영숙 : . 그랬어요. 난징에서 여학교를 다니던 틈틈이 상하이로 가서 망명 중이던 임시정부의 여러 인사와 교유했지요. 당시 나에게 큰 감화를 준 인물은 도산 안창호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도 총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하다며 나를 남달리 중히 아끼셨고요.

인터뷰어 : 여학교 시절 별명이 마르크스걸이었다는데…… .

최영숙 :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 명덕여학교에 들어간 나는 몇 달 만에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어요. 언어감각이 남달랐거든요. 이듬해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당시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난징 회문여학교로 편입했어요. 그 곳에서 영어와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 친구들과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토론회를 자주 가졌는데, 그 때부터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마르크스 걸이 됐지요. 인도의 사로지니 나이두 여사와 앞서 말한 엘렌 케이 사상에 심취한 때도 이 시절이었어요.

인터뷰어 : 스웨덴 유학시절 중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받기도 하셨다는데요. 유학시절 이야기를 부탁드릴게요.

최영숙 : 내 인생에서 가장 빛이 나던 때였지요. 스물 한 살 되던 해인 19267, 나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어요. 상상하던 데로는 아니었지만 조선에 비하면 스웨덴은 정말 천국 같은 곳이었어요. 노동자와 여성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곳, 노동자들이 배불리 먹고도 저축도 가능한 곳이었지요. 나는 여성인권과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런 게 잘 갖춰진 스웨덴은 참 내게 특별했어요. 집안에서 유학비용을 한 푼도 지원받을 수 없었기에 울고만 있을 수도 없고 뭐든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했어요. 해서 저는 일단 시골학교의 청강생 신분으로 들어가 낮에는 스웨덴어를 공부하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어요. 외국 사람들은 자수 같은 걸 좋아해서 베갯잇 하나에 5, 6원의 수입이 생겼어요. 해서 그다지 힘들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금까지 할 여유도 생겼지요.

1927, 내가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자,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어요. 동양문화와 고고사에 관심과 흥미가 유별났던 아돌프 황태자가 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면서 수집해온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중요 내용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어요.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면서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겠지요. 아돌프 황태자는 나에 대한 신뢰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황태자 도서관에서 일한 덕분에 나는 스웨덴 지식인들과 폭넓게 사귈 기회가 많았고 모두가 나를 신뢰했고 좋아했지요. 내가 그리 허망하게 죽고 난 후, 혹여 그들이 조선에 와 종종 내 안부를 묻곤,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지요.

 

행복의 기회마저 조국을 위해 희생한 대가.

인터뷰어 : 인도에서 결혼도 하셨고 아이도 임신 중이셨는데 홀로 귀국하셨다지요.

최영숙 : 그 점에 대해서 정말 억울한 점이 많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나를 오해하기를, 새파란 처녀가 외국에서 풍기문란으로 혼혈아까지 임신해 왔네, 어쨌네, 하고 입방아를 찧기 바쁘더이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관심이 없고 터무니없는 사생활로 인해 이름이 알려진 바가 없지 않습니다. 풍기문란이라니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스웨덴 유학시절 파란 눈 미남의 청혼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요. 실제로 내 일기에도 이런 구절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S군아 / 네 사랑 아무리 뜨겁다 해도 / 이 몸은 당당한 대한의 여자라 / 몸 바쳐 나라에 사용될 몸이라 /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1930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은 나는 미래가 보장된 스웨덴 생활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듬해 1, 귀국길에 올랐어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거덜 나있고, 정신병에 걸린 오빠와 어린 동생들의 학업까지 모든 게 내 몫이었어요. 조선인 최초의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였으니 내가 귀국해 집안을 일으키리라 모두들 나만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 역시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고요. 해서 귀국을 서둘렀지요,

마지막으로 유럽일주와 이집트, 베트남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오랜 피로의 누적과 이집트의 기후가 안맞는 탓에 급격하게 쇠약해져 결국 탈이 나 그나마 있는 돈도 약값으로 다 쓰고, 인도행 배 삯조차 없었어요. 해서 별 수 없이 화물칸에 몸을 싣고 인도로 향했지요. 낮에는 배 갑판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 한 남자가 나를 며칠 간 유심히 바라보고 마침내 다가왔어요. 1등실 승객이었는데 영국에서 무역상을 하는 인도남자였어요. 무엇보다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고 신념과 가치관도 비슷했어요. 나이두 여사의 생질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는 곧 사랑에 빠졌어요.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내 의견을 언제나 존중해주었어요. 결혼 직후, 임신 중임에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나를, 조국에 대한 내 사명감을 이해한다며 붙잡지도 못한 바보 같은 사람이었어요. 단지 1년에 한번씩 자기한테 와달라는 말만 남긴 채 나를 조선으로 떠나보내 주었어요. 그런데 그게 영영 이별이 되고야 말았죠.

 

돈의 냉혹함에 무너진 경제학사.

인터뷰어 : 그럼 귀국 후 어떤 고초를 겪으셨고, 왜 콩나물 장사까지 하게 되신 건가요?

최영숙 :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수만번 갈등을 하다가 어렵사리 귀국을 해보니 조선은 피폐 그 자체였어요. 대공황여파로 전문학교를 나온들 실업률이 50프로에 육박했어요. 더구나 조선인들, 게다가 여성들에게는 취업의 기회마저 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대학교수, 신문기자 자리를 물색했으나, 현실의 벽은 매번 나를 무참히 무너뜨렸어요. 사실 일본 총독부의 허가가 있어야 취업이 가능한데. 그들은 선진 문명을 배우고 와서 노동운동과 여성의 개화에 목적을 둔 내 존재가 두려웠던 거죠.

내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나는 부모님께 결혼과 임신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나날이 힘든 날의 연속이었지요. 결혼반지마저 내다팔고 온 집안의 고무신을 모아 전당포에 잡혀 양식을 마련해야 했을 때는 절망적이었지요. 그때 비로소 나는 돈의 위력을 깨달았죠.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도 내 경제적 곤란을 말하지 않았어요. 이화학당 절친 임효정이 얼마간 도와준다고 했을 때에도 완강히 거절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활신조였으니까요. 생계가 많이 어려웠지만, 사회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서서 솔선수범했어요. 낙원동 여자소비조합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손해 볼 걸 빤히 알면서도 자금을 융통해 인수하기도 했고, 이화학당 은사 김활란이 공민학교를 세울 계획을 말하자 만사를 제쳐두고 밥을 굶어가며 도서관에 드나들면서 공민독본 편찬에 적극 나서기도 했지요.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인 내가 콩나물장사에 나선 것은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소비자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어요. 장사가 그리 어렵고 힘든 일인지 그때 비로소 몸소 깨달았지요.

무리 중 영양실조, 소화불량, 임신중독이 차례로 찾아왔고 급기야 각기병까지 걸려 다리가 코끼리다리처럼 퉁퉁 부어올랐지요. 결국 꽃 피는 4, 나는 실신해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고 아이는 유산되었고, 수술 과정에서 혼혈아라는 사실 때문에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지요.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 423, 나는 27년의 짧지만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던 생을 마감했지요.

장례비용조차 마련할 길이 없어서 친구 효정이가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어요. 내가 누울 묏자리 한 평 구하지 못한 탓에 홍제원 화장장에서 내 고단한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었지요. 내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 후, 남편 로로부터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와 달라는 편지가 도착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지요.

내게 잘못이 있다면 아마 두 가지였을 거예요. 세상을 너무 일찍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내 개인이 행복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조국이라는 큰 봇짐에 희생해버렸다는 것.

인터뷰어 : 참 가슴이 먹먹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홍지화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