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석유협회 사외보 2017년 겨울호> 역사인물 가상인터뷰

 

현해탄에 던져진 고독한 꽃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최초의 대중가수, 최초의 국비유학생, 당대 최다음반판매량 기록자, 최초의 방송국 여류사회자, 최초의 현해탄 정사 등등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무척 많습니다. 고작 삼십여년 남짓한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녀의 인생은 현해탄의 물결처럼 파란만장하고도 거침없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사의 찬미의 주인공 윤심덕(尹心悳 : 1897 ~ 1926)입니다.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가창력으로 당대 최고의 스캔들메이커였으며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희곡작가이자 촉망받는 엘리트였던 연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 정사로 생을 끝마치면서 당시 사회에 큰 충격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요. 현해탄 정사는 그들이 처음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당시 페시미즘의 사회분위기를 타고 모방 자살도 유행처럼 번져 한동안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연인과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기에 정사를 선택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윤심덕 씨를 이 자리에 소환해서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평양 제일의 왈녀, 마침내 세상의 중심에 서다.

인터뷰어 : 안녕하세요, 윤심덕선생님.

윤심덕 : . 조선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자리를 빌러 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모두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어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을 것 같아요.

윤심덕 :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왈녀’, ‘말괄량이’, ‘대장이런 것들이었어요. 옛날 할머니들 말씀으로 하면, 어려서부터 계집에가 사내아이처럼 기가 드샜지요.

어릴 적에 평양의 부촌에 살았지만 저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어요. 13녀 중 둘째딸. 아버지는 풋나물 장수였는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지요. 매사 적극적이고도 강한 성격이셨던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셨죠.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는데 그 때문에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뜨셨죠. 엄마는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어려운 살림에도 저희 자매들을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고등교육까지 시켜주셨지요.

저는 강직하고 이치에 밝은 어머니의 성품을 빼닮았어요. 소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교회활동과 어머니에게서 배운 노래며 성경지식으로 두각을 나타내서 반장을 도맡아했고, 자화자찬이지만 영특해서 학업성적도 우수했어요. 친구도 남녀나 나이에 구분을 두지 않고 사귀었고, 워낙 성격이 괄괄하고 활발해서 짓궂은 상급반 남자아이들까지 제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었어요. 한마디로, 리더십 강한 골목대장이었지요.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우리 형제들은 철이 일찍 든 편이었지요. 저는 둘째였지만 어려서부터 항상 집안의 기둥역할이었어요. 특히 제 음악적 재능은 학교, 교회, 동네를 넘어서 나중에는 평양시내에까지 소문이 자자했지요. 어릴 때부터 음악이 참 좋았어요. 얼마나 좋았으면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도 멀리서 교회의 찬송가가 들리면 밖으로 무작정 뛰쳐나가 부지깽이를 들고서 팔을 휘저으며 지휘를 했겠어요. 저는 어떤 노래든 한번만 들으면 완벽하게 기억해 따라 부를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보고 음악의 천재라며 감탄했죠.

인터뷰어 : 그럼 그 때부터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신 겁니까? 현대와는 달리, 당시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직업으로 삼기가 매우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요.

윤심덕 : 인프라가 아예 전무했지요. 속된말로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어요. 제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헌신 외에도 한 분의 노고가 더 있습니다. 제게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신데, 미국인 의사 홀부인입니다. 엄마가 평양 광해병원에서 한동안 사무 일을 보셨는데, 한 미국인 여의사가 유독 나를 예뻐했습니다.

내 영특함과 재능을 꿰뚫고, 경제적 후원을 약속하시며 의사가 되라 하셨지요. 가난한 조선에는 예술가보다 의사가 더 필요할 거라면서 저를 설득했지요. 부모님도 제가 홀부인처럼 의사가 되기를 원하셨지만, 끝내 저는 의학공부가 아닌,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조선 최초의,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홀부인은 내 뜻을 존중해주셨고, 음악가의 길을 걷더라도 제 후원을 멈추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지요. 내가 경성여고보 사범과(구 경기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그 분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평양에서 튀던 아이가 서울이라고 안 튀겠습니까? 서울에서도 물론 튀었지요. 늘 우등생이었고, 여전히 음악적 천재였으며, 말괄량이였지요. 자수솜씨가 좋아서 기숙사 친구들한테 팔아 제 용돈과 평양집 생활비를 보태기도 했고요 졸업 후, 1년쯤 원주, 춘천 등지를 떠돌며 적성에도 안맞는 교사를 했어요. 얼토당토않은 산골마을에 발령이 나서 총독부 학무과장의 멱살잡이도 해봤고요. 당시 사범과는 관비로 공부했기에 의무적으로 1년 간 교사직에 봉사를 해야 했지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내 나이 열아홉에 드디어 일본 유학길이 열렸어요. 일본 총독부 장학생선발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1915년 봄, 도쿄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어요. 내 파란만장한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 시기였죠.

 

불모의 땅에서 스러져간 선각자의 이름이 되어.

인터뷰어 :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요즘 말로 하면 퀸카로 통했다죠?

윤심덕 : 사교성이 남달라서 화가 겸 문인이었던 나혜석 다음으로 제가 인기가 많았지요. 한 남학생은 만날 꽃다발을 바치며 프러포즈를 했는데 제가 거절하자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고.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야 있지만 싫은 것을 좋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메이지유신의 영향으로 당시 도쿄의 분위기는 우리 조선과 많이 달랐어요. 밤늦게까지 오페라와 영화를 봤고 모든 게 흥청망청 자유로웠어요. 제가 꿈꾸었던 곳이었지요. ‘조선의 윤양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인터뷰어 : 그럼 도쿄 유학시절에 연인 김우진 씨를 만난 것인가요?

윤심덕 : . 처음에는 서로 취항이 아니라서 소가 닭 보듯 했지요. , 무슨 저런 건방진 계집애가 다 있어? 어디 목포 촌뜨기가?, 하며 서로 같잖게 봤어요.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그는 고향에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 일본인 간호사 애인도 있었으니까요.

김우진씨와는 조선 유학생들이 얼마 되지도 않고, 서로 뭉치다 보니까 한번씩 보면 눈인사정도 나누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러던 게 김우진씨가 조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극단 동우회에 나도 함께 하게 되어 방학 중에 잠시 귀국, 전국 순회공연을 했어요. 그가 그때부터 나를 눈여겨봤다고 해요. 노래도 잘하고 묘한 매력이 있어서. 한번은 그가 자기 집에 초대를 해서 동생들과 함께 목포에 갔는데 세상에 그렇게 큰 집은 처음 봤어요. 사람이 어찌나 검소한지 부잣집 아들 티를 전혀 안내서 몰랐지요. 알고 보니 목포 만석꾼 장남이었어요. 근데 그이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돈과 권력에 타락한 자기 아버지를 증오하고, 부르주아의 자식이라는 것에 심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어요. 단 한번도 돈으로 위세를 부리거나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딸깍발이 선비같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사람들의 오해와 따가운 시선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진심어린 조언과 위로를 아끼지 않았지요. 내겐 그가 정신적 지주였어요.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많이 사랑했냐, 라고 묻는다면 분명 나일 거예요. 자존심 상하지만 그는 나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어요.

인터뷰어 : 두 사람이 함께 현해탄 정사를 선택할 만큼 당시 상황이 좋지 못했던 건가요?

윤심덕 : 그 전에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이 우리를 압박했어요. 나는 음악의 불모지 조선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음악의 꽃을 피워보려 애썼어요. 귀국 후 몇 달간 공연이란 공연은 다 참석해 노래를 불렸어요. 제가 좀 유명해지니까 일본 총독부 예능부장이 나를 불려서 압력을 넣더군요. 총독부에서 유학을 보내 줬으니까 일본 노래를 부르라고, 그리고 일본인들 연회에도 꼬박꼬박 참석하라고요. 그건 나한테 기녀가 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어요.

나는 조선의 성악가로서 활동하고자 했지, 일본인의 여종이 될 수는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설 땅이 점점 좁아졌는데 남동생의 미국 유학자금이 필요했어요. 내가 집안의 가장이었으니까. 내가 돈이 필요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나를 탐내던 돈많은 남자들이 연락을 해왔어요. 요즘 말로 하면 연예인 스폰서제의지요. 결국 장안 최고의 재력가 이용문과의 스캔들로 나는 그야말로 그동안 쌓아온 걸 모두 잃게 됐지요.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사람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노래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럴 바에 차선책으로 배우를 하겠다고 나섰지요. 당시 여배우는 술집 여자도 안할 만큼 천하디 천한 직업이었어요. 김우진씨의 조언으로 토월회에 입단했는데 연기가 안되니까 그것도 쉽지가 않고 나는 계속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죠. 더 이상 내가 발 디딜 곳이 없었죠. 때마침 조선총독부에서 또 일본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하라는 압박이 들어왔죠.

김우진씨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어요. 부친과 사업문제로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었고 잠시 일본으로 가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독일로 가서 연극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했는데, 귀국을 하면 꼼짝없이 곳간이나 지키는 신세가 될 게 빤했지요.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길이 아닌데 그 지옥 같은 길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인터뷰어 : 당시 대중음악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경우가 드문데, 유일하게 선생님의 마지막 곡 사의 찬미는 백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어요. 이비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선생님의 자작시를 붙였다지요?

윤심덕 : . 원곡은 밝고 경쾌한 리듬인데 반해 내 노래는 많이 어둡습니다. 당시의 내 생각을 담았으니까요.

인터뷰어 : 끝으로 한 말씀 남기신다면?

윤심덕 : 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했고 개척했습니다. 나는 꿈과 포부와 사랑에 당당했습니다. 결국 자살로 불꽃같았던 서른 해의 삶을 끝맺었지만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는 너무 빨리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불행했지요. 너무 일찍 피운 꽃은 꽃샘바람에 하르르 지듯이.

인터뷰어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홍지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