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시작한 1907년경, 주색(酒色) 잡기로 소문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그의 측근에게 조선엔 왜 미녀(美女)가 없느냐고 다그쳤다.
옆에 있던 매국노 송병준(宋秉晙)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대가 미녀를 다잡아 갔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다른 일본인 측근이 조선의 미인을 싹쓸이 한 것은 왜인(倭人)이 아니라 몽골인(夢古人)이라고 반박했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남-북 양쪽에서 수많은 외침을 겪었고, 그 때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자들이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느 때나 고난의 직격을 당하는 건 여자들이다. 남자의 패배는 여자의 굴욕(屈辱)을 부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남자에겐 나라를 지킴에 신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1930~40년대에도 우리는 일본군국주의 국가권력에 의해 숱한 젊은 여성을 맥없이 빼앗겼다.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 반도의 조선인에게도 징병, 징용령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전시아래 국민통제강화를 위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미·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는 1943년에는 대일본노무보국회(大日本勞務報國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회장은 전후 민주일본 부흥의 주역으로 평가 받은 길전무(吉田茂) 당시 귀족의원이다. 내무·체신·철도·후생대신 등 「조선여성 사냥」을 관련 정부 부서의 장들이 고문을 맡고, 후생·내무·상공·해무·철도 등의 차관·국장들이 실무책임을 맡았었다.
미국정부가 1944년 8~9월에 작성한 일본 정부의 정신대(挺身隊) 강제동원 관련 문서가 뒤늦게 밝혀졌다.
문제는 우리정부의 태도다. 정부도 한·일 국교로 징병·징용·정신대 문제가 다 해결 되었다고 믿는지(?) 적어도 미·일 정부와 교섭이라도 해서 역사의 기록으로 정리해둘 노력이라도….
역사를 날조하는 나라
▲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한 선·정릉 가운데 「선릉(宣陵: 조선조 9대 성종대왕의 릉)」 |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5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덕천(德川)막부와의 접촉으로 조선조정에는 일본과의 화해무드가 무르익어갔다. 그러나 국가간의 정식 국교가 수립되자면 서로간의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을 통해 국서(國書)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비롯되는 것. 선조 39년(1606) 조선과의 조속한 국교회복에 안달이 난 대마도주는 그의 참모 귤지정(橘智正) 다짜바나 도모마사를 조선으로 보내 조선 통신사 파견을 간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선 조정은 아무리 일본의 진심이 화의(和議)에 따른 국교수복에 있음을 사명대사를 통해 익히 귀국보고를 받았을 지라도 임란으로 인한 체면과 구원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지라 두 가지 화의조건을 통고한다.
첫째 임진왜란 때 조선국왕의 능침적(陵寢賊)을 파헤친 범릉적(犯陵賊)을 잡아보낼 것. 둘째 일본국왕의 사죄국서를 먼저 보내올 것. (여기서 범릉적이란 임진왜란때 오늘의 서울 강남구에 자리 한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의 릉)을 파헤친 도굴범을 말한다.)
특히 범릉적에 대해서는 나라의 체면이 걸린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중대 범죄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어려운 수교조건을 통고 받은 대마도주는 크게 당황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국왕격인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사죄국서를 쉽게 받을 것 같지가 않았다.
▲ 조선통신사의 국서 |
▲ 옥새 |
대마도주는 그의 참모 유천조신(柳川調信)과 외교승(外交僧) 현소(玄蘇)을 불러, 몇 날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 국서위조였다.
몇 천리 떨어져 있는데 가짜 국서를 만든들 누가 알겠는가. 대마도의 운명을 걸고 극비리에 이 엄청난 국서위조행위가 자행되었다.
또 조선이 요구한 첫째 조건의 능침범(陵侵犯) 두 놈쯤 잡아 보내는 것은 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대마도 감옥에 있는 잡범 아무나 두 놈을 묶어 보내면서 이 놈들이요 하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덕천가강의 친필 사죄국서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 문서의 전문은 현재 한·일 양국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실록에 그 일부가 실려있다.
‘범릉적 두 놈은 마침 대마도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대마도주로 하여금 잡아 보내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저희 나라가 전에 크게 잘못하였음을 작년 송운대사(사명당)에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바라옵 건데 전하께서는 성은을 베푸시어 속히 사신을 파견하여 주시와 우리 일본 66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를 직접 느끼도록 하여 주신다면 두 나라의 큰 복이겠나이다.’
덕천가강 명의로 된 이 가짜 국서 말미에는 당시 명(明)나라 년호인 「萬曆3年」과 함께 「일본국왕(日本國王)」이라는 큼직한 도장도 찍혀 있었다. 물론 대마도의 도장쟁이가 새긴 가짜 도장이었다.
대마도주는 같은 해 11월 가짜 국서를 그의 가신인 귤지정을 일본 국왕의 왕사로 가장해 잡범 두 놈과 함께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놀란 것은 오히려 조선 조정이었다.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던 것이 불과 8개월만에 즉각 조건이 수락된 것이다. 가장 통분하게 여겼던 능침범을 잡아 보내고, 덕천가강의 사죄국서까지 보내 왔으니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조정 일부에서는 느닷없이 잡혀온 능침범 두 놈에 대하여는 의심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으나 일본국왕이 보낸 국서가 가짜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제1회 통신사의 부사인 경섬(慶暹)이 사절단과 함께 대마도에 이르러, 도주가 베푼 연회석상에서 외교승 현소에게 물었다. 귀국이 보내온 국서를 보면 귀국의 관백(關白)은 왕호(王號)를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일본국왕(日本國王)」, 이란 도장을 찍었소. 국서는 정말 덕천가강공이 쓴 것 사실이요. 찔끔해진 현소는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그런 것을 하문하십니까. 그 도장은 전년에 천조(天朝: 明나라)에서 칙사를 보내 우리 관백에 주고 간 것입니다. 경섬이 다시 물었다. 그래요! 그때 덕천가강공은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도장을 사용하고 있는가.
말문이 막힌 현소는 머리를 숙인 채 멋쩍은 듯 씩 웃고 말았다. 조선에서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자꾸 추궁해 봤자 조선조정의 체면과 처지도 외교적으로 이상해지기 때문이었으리라.
일본국왕의 국서를 받은 조선조정으로서는 그냥 있을 수도 없었다.
드디어 이듬해인 1607년(선조 40년) 제1회 통신사로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경섬을 부사로 하여,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環使)라는 이름으로 460명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키로 하였다.
‘회례(回禮)’란 일본이 국서를 보내준 것에 대한 예의로 보낸다는 뜻. ‘쇄환(刷還)’이란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돌려받기 위한 사절이란 뜻이다.
조선 조정도 선조 명의로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썼다.
‘회답을 드립니다.
귀국과 화친하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오나 귀국에서 이제 낡은 정치를 개혁하고 새 정치를 펼치면서 문안의 글월을 먼저 보내면서 전대(前代)의 잘못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성의를 다하시니 말대로라면 어찌 두 나라 백성의 흥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사신을 보내 회신합니다. 「(… 貴國革舊而新 問札先反 謂改 前代非者致款至此 苟如斯設 非兩國生靈之福也 此馳使介庸 答來意 …)」’라 쓰고는 「위정이덕(爲政以德)」라 새긴 왕의 국새(國璽)를 찍었다.
이를 미리 읽어본 대마도주는 혼비백산했다. 일본 막부에서 볼 때는 이런 수치스런 국서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본에서 보내지도 않았는 국서의 회신이라니…, 기가 찰 일이다. 만약 이 국서가 그대로 막부에 전달되는 날이면 모든게 탄로나, 대마도주는 목이 달아날게 뻔한 일이었다.
이들은 다시 숙의를 거듭한 끝에…, 에라 모르겠다. 내친김에 끝까지 속이자.
조선국왕의 국서도 위조하여 막부에 전달하기 전에 바꿔치기 하면 될게 아닌가. 먼저의 첫머리를, 귀하가 보낸 서신을 읽어보고 회신한다는 뜻이 봉독을 그냥 ‘편지 드립니다’ 라는 뜻의 봉서(奉書)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일본이 임진왜란의 잘못을 뉘우쳐 사죄하고 강화를 위해 먼저 사신을 보내왔으므로 이에 회답한다는 내용을 빼고 모두 열두 곳을 뜯어 고쳤다. 물론 조선국왕의 옥새도 대마도 도장쟁이를 시켜서 다시 만들어 찍었다. (최근 이때 사용했던 조선국왕의 가짜 옥새가 대마도주 종실 도서관 책 사이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고, 또 얼마전 통신사 특별전에 전시된 적도 있다)
문제는 조선국왕의 국서를 어떻게 바꿔치기 하느냐가 큰 문제.
당시 조선국왕의 국서는 별도의 상자에 넣어 특별 가마에 싣고 신주 모시듯 앞뒤로 호위군의 경호를 받으며 운반되었다. 뿐만 아니라 숙박시에도 호종군관이 밤낮으로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있어 바꿔치기란 꿈같은 일이었다.
통신사 행렬은 점점 에도(江戶)에 다가가는데 좀처럼 기회는 오질 않았다.
초조해진 대마도주 일행은 실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바꿔치기 대드라마는 결국 일행이 에도에 도착하여 막부에서 접견이 이뤄지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대마도주 참모 유천조신의 옷소매 속에 감추어진 가짜 국서와 조선의 진짜 국서가 접견 직전 번개처럼 바꿔쳤다.
이런 목숨을 건 대담한 국서날조 및 바꿔치기는 그 뒤로도 계속 자행되어, 제4차 통신사가 파견되는 1636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