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 핀 천재 물리학자의 꿈

20세기 현대 이론물리학의 금자탑을 세운 이휘소 박사.

 

<: 홍지화 /소설가>

 

오늘 소환이 예정된 분은 1백년에 한 분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분입니다. 이 분을 일컫는 별명은 꽤 다양한대요. 이를테면, ‘팬티가 썩은 남자’, ‘노벨상 제조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핵물리학자로 더 많이 알려진 분입니다. 현재 생존해 계셨더라면 우리나라 출신 물리학자들 중 가장 먼저 노벨상에 근접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론물리학의 거목 이휘소(李輝昭, 1935. 1. 1~1977. 6. 16) 박사이신대요. 학계에서는 벤자민 리(Benjamin, W. Lee)라는 영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지요. 고작 20년도 채 되지 않는 학자로서의 짧은 연구 기간 동안 게이지이론의 재구격화, 참 쿼크입자 제시, 힉스입자 예견 등등 그 어떤 물리학자보다 경이로운 연구 성과를 내셨지요,

그는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지난 2013년도까지 그의 논문이 다른 논문에 인용된 횟수만 하더라도 14천 회로, 지금까지 유래가 없는, 논문의 표준 모형을 제시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정점이자 지금까지도 세계 석학들의 무한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휘소 박사님을 이 자리에 모시고 여러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내 근본은 부모님, 특히 지혜롭고 인자하신 어머니.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먼저 박사님이 연구하신 물리학, 그것도 이론물리학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은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쉬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휘소 : 혹시 지금 사람들이 옛 동요를 기억하는지 모르겠소. “바윗돌 깨뜨려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조약돌, 조약돌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이렇게 물질을 잘게잘게 쪼개면 마지막에는 가장 작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홀로 남을 겁니다. 바로 그것이지요. 내가 연구한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게 쪼개진 알갱이, 즉 소립자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연구하는 고에너지 소립자물리학이었어요.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장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물질을 찾아내는 것. 그게 내 역할이었어요.

인터뷰어 : 그렇군요. 박사님은 소년기에 어떤 아이셨어요? 보통 천재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굉장히 호기심도 많고 유별나잖아요.

이휘소 : 지적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어요. 궁금한 건 꼭 답을 알아야 직성이 풀렸지요. 다행히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당시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의사셨어요.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극진하셨지요, 내 지적 호기심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셨고, 곁에서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지요.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을 만큼 선한 분들이셨지요. 그래서 우리집은 화목했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유하진 않았어요.

특히 어머니가 무척 인자하고 자상하며 지혜로운 분이셨어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내 질문에 짜증 한번 내지 않으시고, 답을 함께 찾아주셨어요. 세상 모든 것이 다 궁금했던 나는, 그러나 때로는 어머니의 설명과 책 속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성이 안찼지요. 내가 원한 지식은 이런 게 아닌데, 어쩐지 뭔가 허탈하고 찝찝한 거예요. 어머니는 그런 제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해 주셨고, “책 속에서 답을 찾지 말고,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책을 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역사, 문학, 과학 등 도서관에 더이상 읽을 책이 없을 만큼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전날 미리 공부를 해서 학교 수업시간이 너무 지루해 딴짓도 많이 했고요.

인터뷰어 :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신다고요?

이휘소 : .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있게 한 뿌리입니다. 내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 해주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 사람은 누구나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는 걸 알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왜 사람은 죽는 것일까? 며칠 동안 고민했지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지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도 어느 날 내 곁에서 영영 사라진다는 게 너무 무섭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먹으면 절대 죽지 않는 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지요.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저에게 그런 말씀을 남겨주셨어요. “휘소야, 파란 바닷물에 빨간색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잉크는 곧 사라져서 보이지 않겠지만 그게 아주 사라진 걸까? 바닷물에 떨어진 빨간 잉크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란다. 잉크는 바닷물이 되어 온바다를 떠돌게 되지. 생각해보렴. 얼마나 신나겠어. (중략) 휘소야,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다. 모양을 바꿀 뿐이지.”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멋진 분이셨지요.

한 젊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아 재학 중이던 서울대학교 화공과에서 물리학과로 전과를 하고자 했지만 불가능해 별 수 없이 자퇴하고 미군 장교부인회 후원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요. 어머니와 나눈 편지가 내게 외롭고 고단한 타국생활을 버티게 해주었어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도 가난한 유학생 처지에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없어서 귀국을 한동안 하지 못했지요. 살아생전 장남으로서 효도도 못했는데, 제가 이렇게 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와서 어찌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나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다.

인터뷰어 : 박사님의 물리학자로서의 지위와 연구실적은 고국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졌어요. 게다가 엉뚱하게도 고국에서는 핵물리학자로 이름을 알리셨어요.

이휘소: 그 점이 나도 참 억울한 부분이오. 나는 이론물리학자지, 절대 핵물리학자가 아니오.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미국이 핵전쟁에 사용한 것에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르오. 과학이 국가 간 권력다툼과 전쟁에 쓰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오. 나는 정말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과학을 하고 싶었소.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우리 부모님이 아낌없이 의술을 베풀었듯이 나도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과학을 하고 싶었소. 소립자 연구 중에 세상의 모든 작은 물질들이 현미경으로 봐야만 볼 수 있는 작은 알갱이들로 분해되는 걸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생각을 했소. 전쟁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의 탐욕 때문이지요. 나는 당시 과학의 불모지였던 고국에 도움을 주고자 귀국을 여러번 고심했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가 영 마땅찮아서 귀국을 미루고 있었어요. 한국인으로 살고 싶어서 미국 시민권 취득도 미루고 미뤄 연구 활동에 지장이 생길 때 즈음에 마지못해 신청한 거요. 그런데 이런 나를 두고 박정희 정권을 도와 핵을 만들려고 하다가 미국 정보기간에 제거됐다니? 황당해도 이렇게 황당하고 억울할 게 또 있겠소? 핵은 내 관심분야가 절대 아니오.

인터뷰어 :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십시오.

이휘소 : 학자나 작가는 본인이 공적으로 발표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사실 확인이라는 게 꼭 밑바탕이 되어야지오. 아무리 픽션이 가미된 소설이라 해도 말이오. 근데 1993년 한 작가가 발표한 소설에 내가 마치 핵물리학자처럼 묘사되었고, 박정희 정권을 도와 핵을 개발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걸로 묘사되었소, 결말에는 한국이 핵을 갖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미국이 주인공을 의문의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걸로.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소. 엄청난 파급력이 이휘소는 핵물리학자다, 군사정권을 도와주다가 제거됐다, 이렇게 사실인양 굳어져 사람들에게 인식돼버린 겁니다. 내 유족이 작가를 상대로 법적 소송도 벌였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작가는 핵물리학자가 어째서 고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게 되냐며 적반하장 격으로 나왔고, 법원은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인정한다며 원고패소판결을 내렸지요. 꼼짝없이 나는 그토록 경멸하던 핵을 만드는 핵물리학자로 낙인찍혔지요. 다행히 근래에 내 제자와 학계의 노력으로 오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있지요.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

인터뷰어 : 박사님은 흔히 노벨상메이커로 통하는데요. 중점연구하신 분야에서 노벨물리학상이 두 번이나 나왔어요. 아마도 더 오래 사셨더라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오펜하이머(전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장)박사가 그런 말을 했다지요. 자기 밑에 아인슈타인과 이휘소가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난 학자였다고.

이휘소 : 1979년 기본입자 사이의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의 통합에 관한 이론 연구와 약한 중성류의 예측으로 내가 모델을 제시한 연구에서 노벨물리학상이 나왔고, 20년 후 1999년 내가 생전에 연구에 매달렸던 게이지 이론에서도 노벨물리학상이 나왔지요. 내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여러 규정상 99년도에 수상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긴 하지만 누가 받으면 어떻소. 학계에서 해당 물질이 발견되어 인정받으면 내 역할을 다 한 거요. 1979년 노벨물리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자인 압두스 살람이 내가 현대물리학의 시계를 10년 앞당긴 천재라며 내가 있어야 할 지리에 자기가 있는 게 부끄럽다는 소감을 밝히는 걸 보면서 감격했소. , 우주를 구성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알갱이인 이른바 신의 입자인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견하고 명명한 것도 나였소.

인터뷰어 : 끝으로 박사님의 평소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이휘소 :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입니다. 얼핏 내가 자존심도 세고 질투심 많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남이 알아낸 것을 뒤쫓아 가는 연구가 아니라, 스스로 물리학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선구자적인 과학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오. 남이 차린 밥상에 수저만 올려놓는 건 재미도 없고, 학자로서 매너도 아니오.

인터뷰어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