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석유협회보 2017년 여름호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 >

 

민본(民本), 오로지 민본만이 시작이자 끝이오.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

 

당대 최고의 필력을 소유한 시인 겸 작가였으며 실학의 집대성자, 유학자, 정치가, 형사재판관, 법의학자, 지리학자, 언어학자, 아동교육가, 건축가, 발명가 등등 그야말로 다재다능하고 프로페셔널한 한 위인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 1762(영조 38)~ 1836(헌종 2)] 선생이 되시겠습니다.

다산 선생은 민본(民本)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구현을 실천하고자 성군(聖君)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의 시너지효과를 내기도 했지요. 정조의 총애에 힘입어 젊은 시절에는 직접 관직에 몸담아 개혁정사를 실천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뜨자, 그는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무려 19년 동안이나 유배지에 발이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개혁이나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보낸 샘이죠. 하지만 그는 유배생활을 되러 하늘이 자신한테 허락한 귀한 시간으로 여겼고, 이때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등 지금까지도 명서로 손꼽히는 50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항간에는 다산학(茶山學)이라는 말도 전해오고 있는데요. 이 자리에 다산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풋내기 성균관 유생, 군왕의 총애를 얻다.

인터뷰어: 안녕하십니까. 먼저 선생님의 사상을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하신다면요?

정약용 : 안녕하시오. 나 다산이오. 반갑소. 내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 민본에 중심을 둔 개방과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자.

인터뷰어 : 선생님은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나요? 무척 똑똑하셨을 것 같은데?

정약용 : 나는 1762년 임오화변이 있던 해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소.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다른 고을까지 소문이 자자했소. 네살 때에는 이미 천자문을 떼었고, 일곱살에는 한시를 지었으며 열살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서 삼미집이란 작품집을 냈지. 뭐 사실 경기도에서 둘쯤 있을까 말까한 천재나 다름없었지, 하하.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내가 장담하오. 어릴 때부터 독서 참 좋은 습관이오.

인터뷰어 : 과거시험으로 입신을 했나요? 정조대왕도 그때 만났던 거고요?

정약용 : 진주 촌놈인 내가 한양으로 터전을 옮긴 것은 내 나이 한창 때인 열다섯에 한양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면서부터였소. 본격적인 입신은 스물두 살 때 초시에 합격하면서였고, 곧바로 성균관에 입학했소. 성균관 재학 시절 이미 정조의 눈에 띄어 영민함을 인정받았지요. 그때 대과와 악운이 있어서 매번 대과에서 미역국을 한 사발씩 들이키는 수난을 겪었지. 내가 공부를 못해서 낙방한 게 절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매번 우등을 하는데, 대과만 보면 그 모양인게요. 요즘 말로 하면 징크스였지. 그러던 차에 내 나이 스물 여덟에 마지막 과거시험 대과에서 차석으로 합격해 벼슬길로 나갔소. 그 때부터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기 직전까지 내 인생은 순탄대로였소.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암행어사도 했고.

인터뷰어 :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정약용 : 햇수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첫 관직을 희릉직장으로부터 출발해, 가주서, 지평, 교리, 부승지 및 참의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 했었소. 참 좋은 시절이었지. 주교사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거중기 설계 등도 내 작품이오. 1792년 수찬으로 재직해 있을 때, 거중기를 발명,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해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보수공사를 맡았소.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화성은 그 무엇보다 각별했소. 거중기와 수원화성을 내 실학사상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나는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제작한 거중기로 약 4만 냥의 경비를 줄였소.

1794년에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는데, 관리로서 부적절한 짓을 많이 하던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와 연천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큰 활약을 했었소만, 이 일이 후에 두고두고 내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소.

서용보는 나로 인해 파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와의 인연이 깊은 덕에 얼마 안가서 사십대 중반에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등 성공해 내 목을 졸랐소. 그는 훗날 정조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위원에까지 올랐는데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소? 한 때의 악연으로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나를 괴롭힌 인간이오.

 

19년간의 길고 모진 유배 생활 끝에 남은 보물들.

인터뷰어 : 선생님께서는 유배를 오래하신 걸로 유명한대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약용 : 내가 스물 세 살 즈음 천주교인 이벽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해 전해 들었소. 흥미진진합디다. 해서 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기도 하고 당시 금기시되던 가톨릭 서적도 몰래 봤고. 더군다나 유교의 나라에서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소. 다들 나를 미친놈 취급했지만 결국 그것으로 말미암아 천주교 관련 사화가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는 등 내 인생이 순탄하지가 않았소.

1789,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관직에 처음 나갔을 때도 가톨릭 교인이란 오해를 받아서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소. 그러나 이후 내 유일한 보호막이었던 정조가 세상을 뜨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죄명도 없이 내 두 형과 함께 장기에 유배되었소. 노론에서는 우리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으나, 바로 위 약종형님만 순교했고, 약전 형님과 나는 배교하여 가까스로 참수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지요. 이후 다시 큰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이 일으킨 백서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강진으로 유배되었소. 그렇다 보니, 한창 일할 나이에 유배지에서 썩은 셈이오. 무려 19년을.

하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헛되다 생각하지 않소. 하늘이 내게 허락한 기회였다 생각하오. 덕분에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고, 제자들과 공저이긴 하지만 오백여권에 달아는 방대한 양의 책도 집필했고, 후학 양성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오. 다만, 내 사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이지요.

인터뷰어: 그 한계라는 게 무엇인가요? 이상에만 머물렀고, 개혁사상을 직접 추진할 수 없었다는 말씀인가요?

정약용 : 이를테면 그렇지요. 생애 대부분을 유배지에 발이 묶여 보냈고, 개혁 정책을 펴볼만한 현장과 유리된 채 이론적인 것만 연구했지요. 오랜 귀양살이를 통해 당시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그에 따르는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 이상적이고도 참신한 개혁안들을 많이 내놓을 수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개혁안을 직접 추진할 수가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 역시 내 개혁안에 현장성 결여라는 한계점을 안겨주었지요. , 개혁실천에 필요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 명확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내 개혁안의 실천적 제한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인터뷰어 : 선생님은 긴 유배기간 동안 5백여권 이상의 방대한 저서를 남기셨어요. 가장 많이 알려진 목민심서,흠흠신서, 경세유포등등. 끝으로 대표적인 저서를 중심으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정약용 : 목민심서는 목민관, 즉 관리와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혀 지방 관리들의 부패와 폭정을 막고자 쓴 책이오. 4816책으로 된 필사본인데, 내가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소.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까지 들어 진구렁 속에 줄을 이어 그득한데도, 그들을 다스리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다시 말해 수령은 임무가 중요하므로 반드시 덕행, 신망, 위신이 있는 적임자를 선택해 임명해야 하고 언제나 청렴과 절검을 생활신조로 해야 하며 명예와 재리를 탐내지 말고 뇌물을 절대로 받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수령은 백성에 대한 봉사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국가의 정령(政令)을 빠짐없이 두루 알리고, 백성의 뜻을 상부에 잘 전달하며 상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해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백성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는 애휼정치(愛恤政治)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을 강조했지요.

두 번째, 흠흠신서는 이른바 형법서인데, 조선시대에 벌어진 살인사건과 관련해 사건 내역과 해결, 범인들 인상착의 및 미제사건에 대한 식견을 집필한 것이오.

조선시대의 수사는 지금처럼 과학적이지 못해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조사와 심리 및 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었소. 사건을 다루는 관료 사대부들이 율문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부족했소. 해서 나는 이를 바로잡고 개혁할 필요성을 느껴 나름의 연구를 걸쳐 집필에 착수했고, 1819(순조 19)에 완성, 1822년에 간행되었소.흠흠신서는 한국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을 심리하는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라 할 수 있소. 그리고 법의학과 사실인정학, 법해석학을 모두 포괄하는 일종의 종합재판학적 저술이란 후대의 평가도 받고 있지요.

경세유표는 미완의 저서로,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소.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였소.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부국강병을 도모했소. 미완의 책이 되어 아쉬움이 많이 남소.

인터뷰어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 홍지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