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도 석유가 있어야 한다
이덕환 교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정유·화학산업 무용론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정유사들이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 투자도 하지 않고, 낙수효과를 내지도 못하고,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과 주민 안전·복지를 위한 기금을 법제화하자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에너지 신산업의 장밋빛 환상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핵심 국가기간산업을 포기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정유사와 화학기업들이 작년에 최고의 실적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4개 정유사가 8조원의 영업이익을 챙겼고, 4대 화학기업도 7조원의 이익을 남겼다. 물론 적지 않은 규모다. 그렇다고 정유·화학산업계가 언제나 호황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2014년에는 정유사들이 적자를 기록했고, 작년에는 원유가 급락으로 매출이 크게 줄어들기도 했다. 실제로 2011년부터 5년간 정유사의 영업이익율은 평균 2.2% 수준이었다. 20% 대의 영업이익율을 기록하는 IT 거대기업이나 철강기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낮은 수준이다.
정유산업은 박리다매 업종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장치산업이기도 하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거대한 정유 시설을 영원히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설의 유지·보수와 탈황·고도화 등의 신기술 도입에 필요한 투자의 규모도 엄청나다. 실제로 정유사들이 지난 5년 동안 고도화 시설에 투자한 비용만 해도 10조가 훌쩍 넘는다. 역시 상당한 규모의 시설이 필요한 화학산업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속적인 투자를 게을리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화학회사는 없다.
최고의 호황을 누렸던 정유·화학업계가 올해 납부할 법인세가 무려 3조 6천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자소득세·증여세·증권거래세보다도 많다. 적자를 기록했던 2014년에도 5천억원의 법인세를 납부했다. 그뿐이 아니다. 작년에 정유사를 통해 정부가 거둬간 유류세는 무려 23.7조원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원유 도입 과정에서 납부하는 관세와 산업부에서 챙기는 석유수입분담금의 규모도 엄청나다. 정부가 요구하는 원유·휘발유·경유의 비축의무에도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정유·화학산업이 정부 세수의 중심축이라는 뜻이다.
준조세 성격의 기금을 들먹이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기업들이 엄청난 준조세에 신음하고 있고, 온 나라를 마비시켜버린 국정농단도 문화융성의 부담을 기업에게 떠넘기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욱이 유류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통에너지환경세가 바로 석유 연료의 사용에 의해 발생하는 환경오염과 주민의 안전·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가 걷어간 세금은 엉뚱한 곳에 쓰고, 명분만 그럴듯한 기금으로 기업에 추가 부담을 떠넘기겠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정유·화학산업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이다. 연료와 산업용 원료를 생산하는 정유공장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섬유·플라스틱·고무를 비롯한 화학산업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 산업구조의 꼭대기에 있는 정유·화학산업과 무관한 일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반도체 산업에서도 정유공장에서 생산한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정유·화학산업은 가장 핵심적인 국가기간산업이다. 한강의 기적은 중화학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이룩된 것이다. 현재도 정유산업과 화학산업을 합치면 내수와 수출 모두에서 가장 비중이 큰 산업부문이 된다. 정유사의 문을 닫아버리면 휘발유와 경유를 수입해야 하고, 화학공장을 포기해버리면 섬유·고무·플라스틱·의약품·농약도 완제품으로 수입해야 한다. 그렇다고 환경이 깨끗해지고, 주민의 안전과 복지가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녹색과 4차 산업혁명의 환상도 경계해야 한다. 전기·수소차도 승용차에 한정된 것이고, 인공지능도 플라스틱·디스플레이와 같은 석유화학 제품이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21세기에도 정유·화학산업은 국가 경제와 안보에 꼭 필요한 핵심 기간산업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