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의 여름이
끝났을 때 누가 웃을까
주용석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국내 정유 4사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4사의 지난해 영업이익 합계는 전년(4조7321억원)보다 70% 가까이 늘어난 8조76억원에 달했다. 이전 최대 기록인 2011년(6조8135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석유화학, 윤활기유(윤활유의 원료) 등 비(非)정유 부문이 두드러진 성과를 낸 덕분이다. 올해도 업황은 괜찮은 편이지만 지난해 실적이 워낙 좋아 실적 증가폭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유사들은 실적 개선세를 이어가기 위해 석유화학 등 비정유 부문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정유사도 놀란 사상 최대 실적
업계 1위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매출 39조5205억원, 영업이익 3조2286억원을 올렸다. 저유가로 제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매출은 전년보다 18%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양호한 정제마진(원유를 정제해 얻는 이익)과 유례없는 석유화학 호황 덕분에 63% 늘었다. 2011년 기록한 영업이익 최대치(2조9595억원)를 뛰어넘었다. 국내 정유·화학사 중 연간 영업이익이 3조원을 넘은 것은 SK이노베이션이 처음이다.
비정유부문이 2조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을 내며 실적 개선을 주도했다. SK이노베이션은 “비정유 중심의 사업구조 혁신과 글로벌 기업과의 제휴 사업이 성과를 낸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GS칼텍스는 2조1204억원, 에쓰오일은 1조6929억원, 현대오일뱅크는 9657억원의 영업이익을 지난해 기록했다. 모두 각 사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이다. 역시 석유화학과 윤활유 부문이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실적 호전에 힘입어 정유사들은 고배당 정책을 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배당금으로 주당 6400원(보통주 기준), 총 5965억원의 배당금을 책정했다. 2015년에는 주당 4800원, 총 4474억원을 배당했다. 에쓰오일도 콘퍼런스콜에서 “그동안 연간 40~60%의 배당 성향을 유지했다”며 “대규모 투자에 상관없이 주주친화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직원 성과급도 사상 최대 수준이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월말 설 연휴 직전에 개인 평가에 따라 기본급의 800~1000%(연봉의 40~50% 수준)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2015년(기본급의 500~600%)보다 성과급 규모가 대폭 늘었다. 연봉이 7000만원 정도인 부장급 직원은 세전 기준으로 최대 3500만원의 성과급을 받았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도 예년 수준 이상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실적 개선의 힘은 저유가
지난해 정유사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배경은 저유가다. 보통 저유가는 정유사에 ‘독(毒)’이다. 하지만 작년에는 사정이 달랐다.
우선 저유가 속에서 정제마진이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유사는 기본적으로 원유를 수입해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을 팔아 이익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 수준보다 정제 마진이 이익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정유업계는 보통 배럴당 4달러 안팎을 손익분기점으로 보는데, 지난해 정제마진은 대체로 배럴당 7달러 안팎에 달했다. 작년 초에는 배럴당 10달러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제 유가가 하락했지만 유가 하락폭보다 석유제품 가격 하락폭이 작아 정제 마진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8년 만에 감산에 합의한 점도 호재였다. 유가가 단기적으로 급등하면서 ‘시차효과’를 누렸기 때문이다. 정유사들이 해외에서 원유를 들여올 때 보통 40일가량 걸린다. 이 과정에서 유가가 오르면 낮은 가격에 들여온 원유를 정제해 비싸게 석유제품을 팔 수 있어 유리하다. 유가가 배럴당 1달러 오르면 정유 4사의 영업이익은 연간 1300억원가량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출지역을 다변화한 것도 실적 호전의 배경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해 튀니지, 콜롬비아, 핀란드 등 새로운 수출 대상국을 확보했다. 호주와 동남아시아 등으로도 수출국을 넓히고 있다.
특히 그동안 석유화학 등 비정유 부문을 전략적으로 키워온 노력이 이번에 결실을 봤다. 정유사 매출에서 비정유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보통 20~30%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기도 한다.
예컨대 지난해 에쓰오일 매출에서 석유화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15%, 윤활기유는 8%였다. 77%는 정유부문이었다. 하지만 영업이익 측면에선 석유화학이 30%, 윤활기유가 25%로 비정유 부문이 55%에 달했다. 비단 에쓰오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다른 정유사들도 비정유 부문의 이익 기여도가 크다. 석유화학 제품과 윤활기유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는 가운데 저유가로 원가 경쟁력이 커진 것이 정유사들이 비정유 부문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린 비결이다.
비정유 사업에 승부
문제는 앞으로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지만 주식시장에서 정유사 주가는 크게 오르지 못했다. 유가에 따라 실적이 크게 출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실제 2014년 예상 밖으로 국제 유가가 급락했을 때 대부분 정유사들이 적자를 기록했다.
이처럼 유가만 쳐다보는 천수답식 사업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유사들은 비정유 사업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석유화학은 기본이다. 에쓰오일은 내년 4월 완공을 목표로 울산공장에 4조8000억원을 투자해 대규모 정유·화학 복합시설을 짓고 있다. 원유를 정제하고 남은 잔사유(원유찌꺼기)를 이용해 고부가 제품인 휘발유나 경유를 뽑아내는 동시에 석유화학 제품도 생산하는 시설이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석유화학 부문이 정유사들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올 초 미국 화학회사 다우케미칼의 고기능성 접착수지(EAA) 사업을 4200억원에 인수했다. 고부가 석유화학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다. 현재 추가 인수합병(M&A)도 모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기차 배터리, 배터리 분리막 등 전통적인 정유, 화학 사업과는 다른 분야로 진출을 꾀하고 있다. 우선 국내 공장을 증설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중국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올해 투자 규모도 작년(8000억원)보다 대폭 늘어난 3조원 수준을 목표로 잡아놨다.
GS칼텍스는 신사업을 찾고 있다. 지난해 7월 신사업 전담팀인 ‘위디아’를 최고경영자(CEO) 직속에 신설했다. 지난해 9월에는 폐목재 등으로부터 ‘청정 휘발유’로 쓸 수 있는 바이오 부탄올을 시험생산하는 공장을 전남 여수에 짓기도 했다.
정유업계에 ‘알래스카의 여름’이란 말이 있다. 추운 알래스카 지방에 잠깐 찾아오는 따뜻한 날씨라는 뜻이다. 호황은 잠깐이고 곧 긴 불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다. 알래스카의 여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관심은 알래스카의 여름이 끝났을 때 누가 웃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