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과학자들 가상인터뷰 2
아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비운의 천재
--고무신박사, 우장춘.
홍지화 소설가
‘서로 다른 두 종은 교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이 ‘종의 합성’의 원리로 우리 농업을 과학적이고 자주자립의 단계로 도약시킨 이가 있습니다. 바로 ‘씨 없는 수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우장춘((禹長春: 1898~1959)박사이신데요. 그는 ‘종의 합성’이란 논문으로, 기존의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보완하여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명성을 날렸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머물었던 9년여 여생동안 육종학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우리에게 제대로 된 먹거리를 제공해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슈퍼맨’이라 이름할 만 합니다. 불과 9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박사는 오로지 조국을 위해, 조국의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 국보급 육종학자, 우장춘박사를 모시고, 그의 굴곡지고 모순된 인생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역적의 아들, 십자가를 지고 귀환하다.
인터뷰어 : 안녕하세요, 박사님. 박사님은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냈는데요. 마지막 9년 5개월을 우리나라에 계시면서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였던 우리의 농업기술을 자립자족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쾌거를 이루셨지요?
우장춘 : 예. 맞습니다. 1950년 내가 일본에서 귀국했을 당시 한국은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일제 식민치하와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빈곤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땅은 이미 황폐화됐고, 농사를 지을 종자를 제대로 생산할 기술조차 없는 형편이었지요.
내가 귀국하는 조건으로 가족 위로금 차원에서 한국에서 준 1백만엔과 내 전재산까지 탈탈 털어 일본에서 살 수 있는 모든 채소와 꽃의 모종들을 모두 사왔습니다. 가장으로서 가족한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당시 나는 한국에 진 빚을 어떻게든 갚을 각오였고, 나를 필요로 하는데 대한 고마움도 있었습니다.
여생을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조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귀국했습니다. 내가 귀국했을 때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 자리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연구소에 불도 안들어오는 형편이더군요. 그곳에서 나는 매일같이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며 한결같은 초심으로 연구에만 전념했죠.
인터뷰어 : 한국에 진 빚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요?
우장춘 : 사실 나는 역적의 자식입니다.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나는 국모를 죽인 매국노의 아들, 즉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 주홍글씨로 인해 내 인생도 많이 굴곡졌습니다. 사춘기 시절,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내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많았지요. 내 아버지는 조선말 개화파 무신 우범선입니다. 조선의 신분제에 불만을 품고 개화된 일본을 동경해 을미사변 때 급진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지요. 당시 훈련대 제 2대대장으로서 군인 동원의 총책임자였으며 황후의 소각된 시신 처리에도 가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가 아관파천 때 정세가 역전되자,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여성과 결혼해 내가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옛 동료의 칼에 죽임을 당해 기억도 희미합니다. 어렸을 때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이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내 아버지가 고국에 진 빚을 내가 대신 갚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인터뷰어 :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핍박과 괄시를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우장춘 : 고국에서 난 역적의 아들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더럽고 재수없는 조센징 (조선인)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절망뿐이었어요. 아버지가 비명횡사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일본인 어머니는 나를 잠시 고아원에 맡겼는데 따돌림을 혹독하게 당했습니다. 원생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선생들조차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나를 때리고 나무랐습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나는 내 운명에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힘이 없지만, 내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너희들한테 복수하겠다며 이를 악물었지요. 다행히 어머니가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나를 집으로 데려가서 그때부터 아버지 지인들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어머니는 내가 조선사람임을 잊지 않도록 각인시켜주었죠.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일본인 이름을 거부하고, 내 본명을 고집해 온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인터뷰어: 그렇다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식 이름은 어찌된 영문인가요?
우장춘: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1937년 당시 나는 2년전에 발표한 논문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인정받고 직장생활도 잘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농림성에서 해고통지서를 보낸 것입니다. 해고 사유인즉, 정규대학 출신이 아닐 뿐더러, 일본 이름이 없는 조센징은 나가라는 것이었어요. 당시 조선인들조차 창씨개명을 하던 때인데, 너는 왜 안하냐는 것이었죠. 일본이름이 없으면 재취업도 안되는 게 현실이었고, 결혼도 할 수 없었죠. 처가의 완강한 반대로 내 아내는 친정과 의절하면서까지 나를 선택했지요. 고심 끝에 일단 후일을 도모하려면 일본에서 살아남아서 이기고 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한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지만, 논문을 발표할 때나 내 업적을 남기는 공적기록에는 언제나 한국 성을 붙여 ‘나가하루 우(禹)로 기록했습니다. 그건 내 자존심이었고, 조선인이라는 자긍심이기도 했으니까요.
고맙다. 마침내 조국이 나를 인정해주었구나.
인터뷰어: 귀국 후, 9년여동안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대단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우장춘 : 앞서 말했듯이 내가 귀국했을 때 한국은 전쟁 중이었고,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린 상황이었어요. 배추도, 감자도, 무도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농사를 지으려면 우선 종자가 필요한데, 식민치하에서는 일본 종자만 수입해 쓰다가 해방 이후 경제와 여러 여건상 계속 수입에 의존할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우선 식량의 자급자족이 절실했지요. 그래서 나는 우리 토질에 맞고 잘 자랄 수 있는 우량종자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골몰했습니다. 그 결과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등 20여 품종에서 우수 종자를 얻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식탁에 오르는 거의 모든 신토불이 채소들이 내가 개발한 것들입니다. 또 벼 이모작의 기틀도 마련했습니다. 내가 병석에서 중증 십이지궤양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까지 품질 좋은 벼를 얻고자 두 눈을 부릅뜨고 벼이삭을 관찰했던 사람입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기아상태에서 차차 벗어날 수 있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세계에서 가장 맛좋다는 제주 감귤도, 강원도 특산품인 감자도 내가 개발한 유량종자에서 태어난 녀석들이지요.
인터뷰어 : 박사님의 심볼마크처럼 된 ‘씨 없는 수박’이 본래 박사님의 개발품이 아니라면서요?
우장춘 : 그렇소. 씨 없는 수박은 본래 1943년에 나와 친분이 있던 교토제국대학 기하라 히토시박사가 개발했는데, 그도 내 <종의 합성>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기에 서로 윈윈한 셈이지요. 내가 한국에 와 1953년에 그걸 만든 이유는, 대중화가 목적이 아니었어요. 일종의 ‘쇼’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농민들이 우리 종자에 대한 불신이 심각했어요. 일본 것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들에게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했어요. 해서 씨 없는 수박으로 전국 시연회를 열면서 우리 종자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지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그렇다보니 어느새 내가 씨 없는 수박의 아버지처럼 돼버린 겁니다.
인터뷰어 : 고국에서 많은 공적을 쌓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은 박사님에 대해 냉소적이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우장춘 : 일본에 처자식을 두고 홀로 와서 곧 일본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나를 못 믿었던 거죠. 오자마자 출국금지명령으로 내 발을 묶어 홀어머니 장례식에도, 딸 결혼식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생이별한 것도 가슴 아픈데, 한국말이 서툰 걸 운운해 친일파라며 조롱했습니다. 나는 한국말은 서툴었어도 모든 공문을 한글로 쓸 만큼 한글에는 능숙했습니다. 그러나 내 등 뒤에는 나를 믿는 농민들이 있어서 나는 그들만 바라보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기 이틀 전, 내 노고를 치하해 정부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상을 수여했습니다. 안익태선생 다음으로 두 번째라더군요. 마침내 조국이 나를, 내 진심을 인정한 것이죠. 조국에 고마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가 진 빚을 갚을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