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를 빛낸 과학자 가상인터뷰 1
하늘을 사랑한 조선 과학의 아버지, 장영실
홍지화(소설가)
오늘은 후대로부터 ‘조선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장영실 대감을 이 자리에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시고 여러 매체에도 꾸준히 언급되는 분이지만, 이해를 돕고자 장영실 대감을 잠깐 소개해 드리도록 하지요.
조선 세종 대의 과학자인 장영실(1390년경~?)은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 그리고 해시계 5종 세트를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인물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조선 과학을 위해 태어난 인물’로 칭송하였다지요.
신분의 귀천이 존재하던 조선에서 말단 최하층 노비 신분으로 태어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손재주로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노비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반전인생을 사셨는데요. 지금부터 장영실 대감께 그 파란만장한 반전인생에 얽힌 이야기를 청해보도록 하지요.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장영실 대감님. 먼저, 대감의 업적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20여년 동안 궁에서 많은 것들을 만드셨겠지만 시간관계상 간단히.
장영실 : 이보게나, 후대양반. 요즘 날씨가 왜그리 변덕스러운 게야? 오는데 고생했잖소. 하늘을 연구해봐, 하늘을. 과학의 불모지였던 우리 시대에도 날씨가 요렇게 구리진 않았는데. 에헴. 내가 세운 업적은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소간의, 규표, 앙부일구를 비롯해 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등 해시계 5종 세트, 에 또 동활자인 갑인자 등 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살아생전 내 사전에 농땡이란 없었고, 쉼 없이 생각하고 뭔가를 만들었어.
인터뷰어 : 부지런했군요. 대감의 존함이 [세종실록]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일 강무(講武)할 때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 15년 9월 16일)’라고 언급됐는데요. 세종대왕의 총애가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영실 : 그랬지. 그 분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 사실 나는 관노였네. 조선같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노비는 사람 취급도 못받았네. 내 부친은 노비가 아니고 원의 귀화인이었지만, 모친이 관기였기에 나도 별 수 없이 노비가 됐지. 노비의 신분으로 내가 태종한테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어서 궁에 들어가기까지 설움도 많았지. 요즘 말로 금수저 은수저 물고 나온 양반것들이 종종 노비가 자기들보다 명석하고 똑똑하니까 시기와 괄시할 때도 있었고. 그 때마다 북받치는 설움을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고 위로를 받았네.
인터뷰어 : 그럼 어떠한 계기로 노비였던 대감이 태종의 눈에 들어 궁에 들어가서 그의 아들 세종 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기셨는지요?
장영실 : 그 전에 한가지 알아둘 게 있네. 민심이 천심이란 말을 하는가? 옛날 왕들은 절대 권력이 하늘에서 온다고 생각했네. 그들은 일식이나 월식, 가뭄, 벼락, 폭우 같은 자연현상을 몹시 두려워했네. 특히 태종 이방원은 친인척을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어서 그 두려움이란 게 말도 못할 만큼 컸네. 하늘의 변고를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그로서는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하늘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걸세. 꽤 명석한 태종은 절대왕권을 구현하기 위해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샤머니즘보다는 과학에 기반을 둔 정치가 필요했지. 그래서 나를 명나라 유학까지 보내 첨단천문지식을 배워오라 명했고, 현왕이었던 그의 아들 세종 또한 인본에 뿌리를 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천문에 해박했던 내가 필요했지. 그는 조선에 맞는 역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인터뷰어 : 세종 때 상의원 별좌를 비롯해 물시계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호군에, 그 뒤로 대호군까지 승승장구하셨는데 추락하는 데는 날개도 없다고 왜 갑자기 곤장 80대를 맞고 파면되어서 궁에서 쫓겨나셨는지요? 그 후로 행적이 묘연하셨고요.
장영실 : 그때가 1442년 (세종24)년이었지. 내가 임금이 탈 가마제작을 총괄 지휘 감독했는데 가마가 제작 중 갑자기 부서진 거라네. 임금이 다친 것도 아니었지만, 의금부에 하옥되어 불경죄로 심문을 받았지. 그나마 세종이 곤장 100대에서 80대로 감해준거라네. 향간에는 간의대 제작으로 인해 명나라와의 외교 분쟁에서 날 보호하려했다는 설도 있고, 20여년간에 걸친 세종의 과학프로젝트가 끝나 내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뭐 어쨌든 인생이란 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사라지는 한 줄기 바람이라네.
인터뷰어 : 끝으로 대표 발명품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먼저 해시계부터.
장영실 : 휴대용 해시계까지 나는 해시계 5종세트를 만들었네.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이천영감 등과 함께 만들었지. 가마솥 같이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어 세로선은 시각선을, 가로선은 계절선을 나타냈어. 지구는 둥그므로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었지. 또 절기마다 태양의 고도가 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24절기도 알 수 있지. 그러니까 시계뿐 아니라 달력 역할까지 한 셈이야. 특히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시간을 알려줬지. 대궐뿐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어.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네. 그 후 계속 단점을 보완해서 일성정시의와 천평일구, 정남일구까지 나왔고, 이것들의 장점과 편의를 살린 휴대용해시계 현주일구까지 만들었지. 앙부일구는 조선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일본에 전해졌고, 조선 후기에도 계속 만들어 사용했지.
인터뷰어 : 물시계도 발명하셨지요?
장영실 : 자격루와 옥루도 내가 만든 걸세. 자격루, 즉 자동 물시계는 중국 송나라의 소송이란 사람이 1091년경에 처음 만들었는데,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물시계였다네. 근데 원리가 하도 복잡해서 그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작동시키지 못해 사라졌어. 세종은 소송의 자동 물시계를 재현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 나는 그를 돕고자 이 자동물시계를 만들기로 결심했지. 당시 세종과 정인지영감 등이 수집한 자료를 참고로 해, 마침내 1438년(세종20)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가 완성됐다네. 예전 물시계는 사람이 계속 물을 길어줘야 하고, 이를 한번이라도 거르면 대혼란이 초래됐지만, 우리가 만든 자동물시계는 사람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완전 전자동이었지. 원리는 간단하네. 파수호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 올리면 그 부력으로 인해 구슬이 떨어지며 종을 쳐 시각을 알리는 원리였네. 자격루는 2시간마다 한 번씩, 하루에 12번씩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렸네. 자시(밤11시~1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리고 쥐 인형이 자(子)의 글자가 적힌 패를 들고 위로 솟았다가 내려가고, 축시(새벽 1시~3시)에는 소 인형이, 인시(새벽3시~5시)에는 호랑이 인형이 종소리와 함께 시각을 알렸네. [세종실록]에는 이를 가리켜 그 장치가 귀신과 같이 움직여서 보는 이마다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적혔다네. 어떤가? 신기방기지?
인터뷰어 : 그렇군요. 현재 매년 5월 19일은 발명의 날입니다. 이 날은 세계 최초 측우기의 발명을 기념하기 위해 재정된 날인데요. 측우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장영실 : 우리나라는 대대로 농업국가였네. 농업국가에서 비처럼 중요한 건 없어. 옛날에는 비가 내려도 정확한 강수량을 잴 수가 없어서 젖은 흙을 파헤쳐 물기가 스며든 깊이를 재 어림잡아 짐작을 했어. 이는 지질마다 다 다르므로 정확한 게 아니지. 내가 어느 날 무심코 물통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착안해 만든 것이 바로 측우기(1441년)라네. 높이 31.5cm, 지름 15.3cm로 만들어진 측우기는 원통형이었고, 통의 표면에 대나무처럼 굵은 마디가 있어, 안에 빗물이 고이면 주척이라고 하는 대자로 고인 물의 깊이를 재서 강수량을 측정하는 원리야. 서양보다 200여년이나 앞섰으며 1442년(세종 24년) 5월부터 한양을 비롯해 각 도의 군현에 설치해 강우량을 측정하는데 요긴하게 사용했지.
인터뷰어 : 동활자 갑인자는 역대 활자본의 백미로 손꼽힙니다.
장영실 : 세종 16년(1434)인 갑인년에 만든 동활자인데, 글자 사이사이 여유가 있고 판면이 크고 늠름해 필력이 좋아 보여서 먹물에 인쇄를 하면 선명하고 아름답게 나온다네. 결과적으로 나로 인해 조선 전기의 과학은 찬란히 꽃을 피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