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의 가상인터뷰

 

조선의 기틀을 세운 거인(巨人), 삼봉 정도전

<: 홍지화/ 소설가>

 

 

흔히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말을 하지요. 여기 그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셨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매주 공중파 드라마에 나오시는 분이라서 요즘 가장 핫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오늘 가상인터부에 초대한 분은 바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우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대감이십니다. 정도전 대감께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역사의 중심에 서서 자신이 꿈꾸던, 민본이 중심이 되는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설계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마련한 혁명의 끝을 보지 못한 채 한때 동지였던 정적 이방원의 칼에 죽음을 맞았고, 조선 왕조 내내 위험인물로 분류되는 수난을 겪다가 겨우 조선 말 흥선대원군에 의해 신원이 복권되는 매우 극단적이고도 반전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 정도전 대감을 직접 이 자리에 모시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인터뷰어 : 대감님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역사적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셨을 텐데요. 고려 말 정치 및 사회상황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475년 동안 존속된 왕조를 갈아치울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란 게 무엇이었습니까?  

정도전 : 맞습니다. 우리는 고려를 갈아엎을 수밖에 없었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서. 흐르는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지요. 당시 고려의 상황이 바로 썩은 호수 같았소. 썩은 호수에서 구더기 말고는 무엇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결국 갈아엎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소. 

인터뷰어 :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정도전 : 후손들이 역사책에서 배웠다시피 당시 지배층을 권문세족이라고 하지요. 권문세족은 대개 세 부류로 나뉩니다. 문벌귀족과 무신정권세력,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원나라의 비호 하에 세력을 키운 친원세력이지요. 이 세 부류의 출신이 아니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들 지배층은커녕 말단 벼슬자리도 구하기가 힘들었소. 나 역시 문장으로 꽤 이름을 떨쳤으나, 출신성분이 별로 내세울 게 없다보니 내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대우를 받았소. 나는 지방의 토착세력 출신이었소. 아버지로부터 노비 몇 명뿐, 물러받은 재산이라고는 하나 없어서 곤궁한 삶을 살았소. 게다가 모계는 노비의 피가 흐르는. 그래서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고도 늘 변변찮은 말단직만 전전했소. 그러다보니 설움이 쌓이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단함이 눈에 보입디다.

백성들은 죽어라 일해도 나아짐 없이 일년 열 두달 굶주림에 등골이 휘는데, 부와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세력과 그들과 결탁한 권력지향적인 승려들만 흥청망청 호사를 누렸소. 그들에게 백성들의 궁핍한 삶은 안중에도 없었고, 자기네들의 부와 권력을 위하여 착취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소. 내가 몇 번 개혁을 시도하다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서 유배를 많이 다녔는데 정말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면서 가슴이 너덜너덜 찢어질 듯 아팠소. 지금 생각해도 가슴에서 뜨거운 열이 솟구치네.

 

인터뷰어 : 그래서 역사적인, 아니, 역사를 바꿀 혁명을 꿈꾸셨군요.

정도전 : 혁명이라. 어느 누구도 자기가 혁명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진 않소.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다 보면 그게 우연찮게 혁명이 되는 거지. 나도 그랬소. 이전의 왕들과는 달리 공민왕은 신분에 차등 없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유학 장려정책을 펼쳤소. 그래서 문벌귀족이 아닌 나도 과거에 급제해서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어 관료생활을 시작했소. 또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어 정몽주, 이숭인 등과도 친분을 쌓았지. 출세의 길이 눈에 보이던 중 갑작스러운 공민왕의 죽음은 내게 시련의 시작이었소.

개혁파였던 나는 그때부터 권문세족들의 눈엣가시였고, 팔도 각지를 돌며 유배 및 유랑생활을 해야 했소. 유배 생활 중,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늙은 농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평안과 고통, 풍속의 좋고 나쁨에는 관심조차 없으면서 녹봉만 축낸다며 한탄했소. 시골 늙은이의 질책은 백성을 위하는 길이 진정 어떤 것인지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소. 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쳤던 민본사상은 절대 허울만 그럴듯한 명분이 아니었소.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내 이 두 눈으로 목격한 실제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지. 그 때부터 나는 내가 백성들을 위해 달라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소. 정치적 시련? ,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었소. 대장부의 큰 야망이 그깟 걸로 꺾이지는 않소. 나는 무쇠처럼 더욱 단단하고 강해졌소. 내 뒤에는 백성들이 있었으니까.

 

인터뷰어 : 후대에 전해지는 일화 중, 대감님이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는데요. 후대에서는 이를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해, 대감님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하곤 하는데, 이성계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정도전 : 당시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는 장수는 두 사람이었소. 최영과 이성계. 최영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나보다 부족하지는 않았으나, 출신성분이 좋아 왕을 사위로 맞을 정도였소. 그렇다보니. 나는 최영보다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이성계에 더 마음이 갔소. 당시 이성계는 여러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문벌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도 인정받지 못한 채 변방의 장수로서 전쟁터마다 투견처럼 나서야 했소. 아무래도 부와 권력을 쥔 최영보다는 이성계가 결핍이 많지 않겠소? 이런 계산 하에 나는 그를 동지로 선택하고, 1383년 어느 가을날에 유배에서 풀려난 후 함주(함흥)로 무작정 그를 찾아갔소.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서 그가 내 포부를 실현해줄 사람이란 확신이 들었소. 나는 이성계에게 한마디 말만을 남겼소. “훌륭합니다. 이 정도 군대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그리고 돌아올 때 아쉬운 마음에 군영 앞에 서있던 노송에 내 속이 보이는 시 한 수를 남겼소.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라는 시를 말이오. 이성계도 내가 필요했을 것이오.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인간관계는 생각보다 꽤 큰 시너지효과를 내는 법이지요.

 

인터뷰어 : 그럼 구체적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어떤 계기로 이루어지게 됐나요?

정도전 : 당시 원나라는 명나라에 밀리는 중이었고, 명의 세력이 점차 강력해지고 있었소. 그런데 명에서 우리에게 매우 불쾌한 요구를 해왔소. 예전에 원나라에서 되돌려받은 쌍성총관부를 다시 달라는 요구였소. 쌍성총관부가 애들 사탕도 아니고, 우리로서는 응할 수 없는 요구였소. 고려 조정에서는 명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지요. 이성계는 명과의 전쟁은 미친짓이라며 반대를 했지만 최영과 그의 사위 우왕은 무조건 진격을 명했소. 왕명이라 어길 수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군대를 끌고 위로 올라갔지만, 위화도 부근에서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합니다. 그 때가 13886, 장마철이라서 강물이 불어나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소. 왕명을 어기고, 군대를 돌렸으니 이성계로서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지요. 결국 위화도회군이 성공으로 끝나 최영을 끌어내리고, 이성계는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됐소. 나로서는 통쾌한 일이었소.

인터뷰어 : 그럼 동지였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는 왜 정적이 되어 끝내 그에게 죽임을 당하셨는지요.?

정도전 : 쉽게 말하면 가치관의 차이, 이상과 현실의 차이였소.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 중심의 왕조국가를 추구했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소. 그리고 내가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소생인 왕자를 세자로 옹립한 점도 그로서는 못마땅했던 거오. 이방원은 굉장히 보수적인데다가 현실주의자였소. 해서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내가 철부지 노친네로 보였겠지요.

인터뷰어 : 끝으로, 대감님이 이루신 성과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정도전 : 꽤 많은 일을 했소. 우선 한양천도를 전도지휘하고 경복궁을 설계했소. 당대 최고재상이 된 나는 숭유억불 정책과 병농일치, 사병혁파 등 조선의 기틀을 세웠소.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꼭 해야만 했던 임무가 하나 있었소. 바로 요동정벌. 당시 명나라의 세력이 만주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소. 만주를 차지하면 조선도 옛 고구려처럼 흥하고 강대해질 것이란 확신이 있었소. 하지만 이방원에게 제거당해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우리민족의 손해이기도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