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의 가상인터뷰③

  

비운의 세자

                                             --사도세자  편

                      <글 : 홍지화/  소설가>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 속에서 ‘사도세자’라 하면, 언제고 왕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해, 혹은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비운의 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권력은 부자(父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도 있듯이 부왕(父王)과 불화를 겪은 세자들이 역사상 종종 있었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직접적인 명에 의해 아들이 뒤주 안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결과를 놓고 보면 비극성과 참혹성은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5∼1776)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가히 압도적이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사도세자를 특별히 모시고 심경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어 : 안녕하십니까. 저하. 

사도세자 :  안녕하시오. 나 왕이 되려다가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세자, 사도세자요. 요 근래 나를 소재로 드라마와 영화도 만들고, 그렇게라도 후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재평가해 주니 더없이 기쁘오.  나는 사실 그리 못나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소.

인터뷰어 : 왕과 세자의 관계가 서열 1위와 2위의 권력관계이므로 부자관계를 떠나 상당히 어렵고 힘든 관계였지요? 응석 같은 건 감히 생각도 못하고. 저하도 아버지 영조와 불화를 많이 겪으시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셨는데 어렸을 적에도 관계가 안 좋았는지요?

사도세자 :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세자한테 응석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소. 결과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내가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실격 당한 것이지요. 우리 아버지 영조가 장자인 효장세자(만 9세에 요절)를 보내고, 마흔을 넘긴 나이에 후궁 사이에서 어렵게 나를 얻었소. 나의 생모 영빈이씨도 옹주만 내리 다섯을 낳은 끝에 왕자인 나를 생산했소. 두 분이 얼마나 좋아했겠소. 얼마나 기뻤는지 부왕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하오. “삼종(三宗. 즉, 효종ㆍ현종ㆍ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라고요.

 그래서 즉각 나를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소.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어린 아이를 원자에, 이어 세자 자리에 올린 건 조선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스피드한 기록이었지. 그만큼 나는 귀한 아들이자, 귀한 세자였소.

인터뷰어 : 듣자하니, 저하께서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시어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 하셨다는데요. 맞습니까?

사도세자 : 그랬소. 나는 말보다 글을 먼저 깨쳤소. 만 두 살 무렵에는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 부왕을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나를 가리켰소. 아직 걸음마도 시원찮을 나이에 나는 60여 자를 알고 있었소.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대신들이 서로 가지려고 잠시 다툼이 일기도 했고, 얼마 뒤에는 내 총명함에 감격한 부왕의 분부대로 종이에 써서 대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소.

 또,「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 내가 당시 입고 있던 비단 옷과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 하고는 당장 벗어던져 그 자리에 계신 어르신들을 깜짝 놀라게 했소.

 어린 시절 세자의 영특함은 아버지와 왕실의 기대를 채우고도  남았소. 내가 어렸을 때 지나치게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나를 향한 부왕과 왕실의 기대치는 하늘처럼 높아만 갔소. 그러나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이 더 큰 법이오. 나는 10대 중반부터 기대에서 멀어졌소.


인터뷰어 : 그러면 언제, 어떻게 부왕과 갈등이 시작됐나요?

사도세자 : 그걸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아버지 영조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고 싶소. 사실 우리 아버지 영조가 자식을, 그것도 하나뿐인 외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만큼 잔인하고 몰인정한 괴물 같은 사람은 아니었소. 권력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노친네가 다혈질인 듯 보이지만, 내면은 상당히 차갑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었소. 캐묻기 좋아하고 아주 깐깐하고, 치밀한 성격이었지. 무수리 소생이라는 열등감과 경종 독살 콤플렉스로 인해 사람을 절대로 믿지 못했고, 항상 시험하셨소. 아들인 나조차 온전히 믿지 않고, 효심과 충심을 시시때때로 시험하셨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선위 쇼’였소.

인터뷰어 : 선위요? 왕의 자리를 내준다, 그런 뜻인가요?

사도세자 : 그렇소.  노친네가 그럴 마음도 전혀 없으면서 걸핏하면 왕좌를 나한테 넘긴다고 쇼를 해대니, 낸들 속이 편하겠소? 그럴 때마다 신하들과 함께 대전 앞마당에 넙죽 엎드려, 아니되옵니다. 분부 거둬 주시옵소서. 아바마마, 를  수천번을 외쳐야 했소.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어둡거나, 그 딴 것은 상관없이. 내가 세상에 나고 대리청정을 하기 전까지 총 5회의 양위파동이 있었소. 대부분 10세 미만이었소 

 부왕은 천한 무수리의 아들 주제에 큰아버지 경종을 독살하고 자신이 왕좌에 앉았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그런 양위 파동을 통해 자신이 왕좌에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어 하셨소.

 왕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강력히 만류해야 했고, 백년 묵은 구렁이 같은 왕과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비로소 어명이 거둬지는 거요. 그러면서 왕권이 더욱 강화되고, 정치적 전환이 이뤄지는 것이오. 부왕도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수단으로 양위 파동을 교묘히 이용했는데, 첫 양위 파동은 내 나이 만 4세 때였소. 노친네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상대로 선위 쇼를 벌일 수 있는지. 아버지 본인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벌이는 선위 쇼에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매번 진정성을 보여야 했으므로 대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대죄해야 했소.


인터뷰어 :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세자저하가 부왕의 눈 밖에 난 게 바로 대리청정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흑자는 저하가 붕당정치의 희생양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세자 : 우리 부자 관계는 대리청정을 계기로 더욱 멀어졌소. 아버지는 나와 권력을 나눌 준비가 전혀 안됐는데 내가 정무에 깊이 관여하고, 노론중심의 정국운영에 반기를  들면서부터 갈등이 심화된 것이지요. 내 나이 만 14세 때인 영조 25년(1749)에 대리청정이 시작됐는데, 그 후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있었소.

 전근대 왕정에서 대리청정은 훈련이 목적이오. 차기 왕좌가 이미 예정된 세자에게 일정부분  권력을 내줘, 시험 삼아 정국을 운영해보라며 부왕이 직접 훈련시키는 거요. 그것은 기회이자 위기였소.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수행하면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굳힐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조정의 신뢰를 잃고 실각할 수도 있소.

 부왕도 사촌기로 접어들면서 학문에 싫증을 내고 글보다 무예와 음주가무를 즐기는 내 기질을 훈련을 통해 바꿔보려 대리청정을 명했소. 하지만 이것은 우리 부자사이와 내 운명마저 초토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소. 부왕은 자신이 어렵게 일군 탕평책을 유지해줄, 학문과 지혜가 뛰어나서 유학으로 무장한 조정대신들을 좌지우지할 세자를 원했소.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소. 뭘 해도 질책과 야단만 맞아 아버지를 뵙기가 갈수록 두렵고 무서웠소. 처음에는 나도 어깨가 쩍 벌어진 당당한 체구에 위엄있는 눈빛과 중저음 목소리까지 갖춰 신하들이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소. 하지만 부왕에 야단맞고 혼나는 게 일상이 되니 갈수록 의기소침해져 멀리서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났소. 급기야는 한 궁궐에 살면서도 몇 달간 부왕을 일부러 뵙지 않고 피한 적도 있소.

그렇다보니 부왕의 눈 밖에 난 것은 당연하오. 내 신경을 건드리면 환관이고 후궁이고 할 것 없이 목을 배고, 동궁 안에서도 히스테릭한 존재가 되어갔소. 부왕의 허락 없이 관서지방 유람도 가고, 동궁에 마음에 드는 여승도 들였고요. 나의 죄명 10가지가 적힌 상소가 올라오자, 부왕은 극도로 분노하셨소. 나는 석고대죄를 했지만 아버지는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다며 궐 밖으로 나가 엎드린 채 통곡하셨소. 나는 부왕이 무서워 벌벌 떨다가 잠시 기절까지 했소. 그러니 내가 온전한 상태였겠소? 그 무렵 부왕에게는 마음에 쏙 드는 후계자감이 있었소.  바로 세손인 내 아들 정조요.

인터뷰어 : 정조임금과 임오화변이 연관이  있나요?

사도세자 : 정조는 나와 많이 달랐소. 학문도  좋아했고. 카리스마와 리더십도 남달랐소. 그러니 부왕이 좋아할밖에. 그 아이가 그리 총명하지 못했다면 부왕도 감히 세자를 갈아치울 생각은 못했겠지. 임오화변이 있기 얼마 전, 그걸 시사라도 하듯 부왕이 그리 말씀하셨소. 삼종을 이을 사람은 세손이라고.

 임오화변이 있기 전날 밤, 궐안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소. 내가 부왕과 세손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 말이오. 내 어머니 영빈이씨는 남편과 손자를 지키려 부왕께 나를 처단해 종사를 바로 세우라 했고, 내 아내 혜경궁홍씨 역시 노론인 친정가문과 아들을 위해 나를 버렸소. 참으로 무서운 두 여자요, 그래서 나는 뒤주에 갇힌 지 9일만에 비참하게 죽었소. 세자가 아닌 폐서인으로. 세손의 왕위계승을 원활하게 하고자 역모 누명은 바로 벗겨졌고, 부왕이 사도세자라는 시호도 부여했소. 즉, 이는 세자가 제거되어 세손이 왕위를 승계한 게 아니라, 세손의 승계를 위해 세자가 제거되었던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