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달리다 멈춘 그의 꿈.

                                  홍지화(소설가, 프리랜서 작가)

인터뷰어: 오늘은 근래 들어 매우 핫(Hot)한 인물이 된 광해군(1575~1641)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광해군: 나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요. 요즘 세상에서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소. 예전에는 연산에 버금가는 폭군이라고 그리 욕을 해대더니만. 역시 사람들은 그때그때라니깐. 빨리 진행하도록 합시다. 여기저기서 불려대니 아주 성가시어 죽겠어.
인터뷰어: 먼저, 전하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아주 극과 극입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보기 드물게 명석하고 똑똑한 임금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폐륜을 저지른 폭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엇갈리는데요. 15년(광해군 재임기간 : 1608~1623)을 한 나라의 임금으로 사셨지만 반정으로 폐위당한 까닭에 ‘조’니 ‘종’이니 하는 번번한 묘호조차 갖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왕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이 점이 상당히 서운하겠어요.
광해군: 나도 그 점에 대해서 할 말이 아주 많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오. 폐자 따위는 기억하지 않소. 백번을 잘 했어도 한번을 실수하면 낭떠러지에 처박히는 게 권력의 속성이오. 내가 재임시절 결정적으로 실수 한 게 딱 한 가지 있지. 인조반정을 못 막은 것. 능양군 그 아이가 그리 큰 괴물이 되어 날 쓰러뜨릴 줄이야. 상상도 못했소.

인터뷰어: 인조반정을 정말 눈치 못 채셨나요? 아무도 귀띔을 해주지 않았나요? 전하의 귀인 내시들조차도?
광해군: 내시들? 쳇, 그것들이 뭘 알아. 나는 사람을 믿지 못했소. 나의 아버지조차도 나를 믿지 않았소. 오히려 내가 당신 권력을 탐할까봐 조바심에 나를 경계하셨소. 임진왜란이 터지자 나를 맘에도 없는 세자로 올리고, 방패로 삼으셨지. 당신은 명나라로 도망칠 궁리까지 하면서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너무 무능한 모습을 보이셨지. 분조(조정을 나뉘어 다스림)로 내가 6년 전쟁을 수습하고 공을 세웠어도 아버지는 달라지지 않았소. 나를 세자자리에서 밀어내고 싶어하셨지. 조금만 더 오래 사셨더라면 나는 왕위를 적자인 영창한테 뺏겼을 걸세. 그러니 내가 누구를 믿을 수 있었겠소. 아버지조차도 내 편이 아닌데. 그렇다 보니 충신도 보이지 않고 간신만 눈에 들어왔소. 바로 이이첨 같은 자.
인터뷰어: 이이첨이요?  난을 일으킨 그 이이첨?
광해군: 내가 인조반정을 막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이첨 같은 간신들 때문이오.  나한테는 충성을 다하는 듯 보여도 뒤에서는 사실을 은폐 조작해서 자기들의 힘을 키우고 사욕을 채우는 게지. 내가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어린 영창까지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까지 폐위시킨 것도 이이첨 등 대북파 간신들의 농락에 넘어가 그리 폐륜 짓을 저질렀지. 나한테 결국 독이 될 줄 모르고, 그들의 말을 너무 잘 믿었소. 
 내 재임 기간 중 50여건의 역모사건이 있었소.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지. 무수한 애꿎은 목숨들이 죽어나갔어. 근데 언젠가부터 역모 사건이 뭔가 앞뒤가 안맞는 거야. 뒤가 구리고 타당성도 부족하고. 해서 나대로 밀착 조사를 해보니, 뒤에 이이첨이 있었소. 그 자 말이라면 뭐든 철석같이 믿었던 내 뒤통수를 친 샘이지.

인터뷰어: 연이은 역모사건에서 이이첨의 힘만 키운 격이군요?
광해군: 그렇지. 사람을 볼 줄 몰랐던 내 인사참사였소. 이이첨을 임금인 나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로 키운 걸세, 그걸 깨달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였겠소. 이이첨에게 더이상 힘을 실어주지 않는 거였소. 그 자의 날개를 꺾고자 모반신고가 들어와도 무시하고, 역모신고가 들어와도 콧방귀를 꾸다 보니, 정작 내 왕좌에 바람구멍 숭숭 뚫리는 것도 몰랐지. 그래서 인조반정이 터진 거요.
인터뷰어: 위인전에서는 당대를 풍미한 훌륭한 신하들도 많던데 전하께서는 믿을만한 사람이 왜 이이첨 뿐이었는지요?     
광해군: 사실 우리 아버지는 본인 능력에 비해 신하복 하나는 정말 끝내줬지. 난세에 인물이 난다고 했던가? 이이에, 이순신에, 곽재우에, 류성룡 영감 등. 기막힌 조합이었지. 근데 내가 왕위에 오르니 그 훌륭하신 양반들이 하나 둘씩 줄지어 세상을 떴소. 임진왜란 때 나를 보필해 나로 하여금 민심을 등에 업게 해준 그 분들이 말이오. 그 분들만 계셨더라면 내가 폐위까지는 안당했을 거요.
인터뷰어: 전하께서는 재임시절 경연에도 소홀히 하셨다는데 신하들과 사이가 안좋있나요?
광해군: 말이 통해야 경연을 하지. 경연이 뭔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를 하며 중요한 정책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자리요. 근데 내 신하들은 내가 무슨 안건만 내놓으면 무조건 안되옵니다 안되옵니다, 그러니 경연에 들어가고 싶겠소? 그리고 나는 나대로 국방력 강화에 신경 쓰느라 바빴소. 임진왜란의 기억은 내게 아주 쓰라린 상처였소. 요즘 세상 말로 하면 트라우마였지. 명과 여진, 왜에 끼어 언제 강대국에 먹힐 지도 모르는 판국에 앉아서 경연이나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인터뷰어: 전하께서 폭군으로 악명 높으신 세가지 이유를 아십니까?  1. 폐륜행위,  2. 우방인 명을 배신하고 미개한 오랑캐들과 친선도모, 3. 지나친 토목공사로 인한 백성들 수탈.  이 부분에 대해 인정하십니까? 끝으로 항변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광해군: 모든 결과에는 그럴 만한 이유와 원인이 있는 법이오. 나보고 폐륜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그 시작은 부친과 영창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무리들이었소. 그리고 명나라도 살짝 끼어 한 몫 했소. 후대에 그런 말이 있다고 들었소. ‘광해는 그리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으나, 앞의 선조와 뒤에 인조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내 자화자찬 같지만, 내 아버지 선조와 인조는 묘하게 닮았소. 자기보다 나은 자식을 시기하고 훼방놓는 졸렬함과 못난 심성까지. 인조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가서 그들의 문명을 배우고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시기해서 제 자식을 죽였다는 설도 있소. 비열하게 내가 잘한 점도 실록에서 모두 지웠고.
 우리 아버지 선조도 마찬가지였소. 나이 오십 중반에 새 중전을 맞았는데 새어머니의 나이가 나보다 아홉살이나 어렸소. 뭐 이건 옛날 왕들의 특권이었으니 둘째 치고, 병중에 그린 수묵화 한 점을 어느 날 신하들 앞에서 공개를 했더랍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그림인데.
인터뷰어: 무슨 그림이었는지요.
광해군: 대나무 그림이었는데, 바위 위에 왕대가 늙어 바람과 서리에 꺾이고 말라 고목이 된 모양이었고, 그로부터 악죽이 뻗어 나와 가지와 잎사귀가 지나치게 무성해 꾸불꾸불 엉킨 모습이었소. 또 다른 하나는 왕죽의 원줄기로부터 나온 싱싱하고 빛이 나는 죽순의 모습이지. 이 그림에서 왕대는 아버지 자신을, 악죽은 나를, 어린 죽순은 영창을 뜻했소. 이 그림을 본 신하들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대번에 알아챘소. 나를 세자자리에서 내치고자 함이었소. 그 때부터 내 자리는 위태로웠소.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는 명나라가 내 속을 굵었소. 임진왜란 중에는 나를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하더니, 정작 내가 왕위에 오르려니 장남 임해군을 걸고 넘어져 책봉을 차일피일 미뤘소. 해서 나는 형에게 미친 척 하라고 시켰고, 결국 내 정적인 형제들을 모두 역모 죄로 처단했소. 내가 그리하라고 시킨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오. 인목대비는 서인으로 강등돼 서궁에 감금당한 신세가 됐고. 그러나 그들이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놔뒀더라면 그렇게까진 안됐을 거요. 성리학 중심의, 특히 효가 기본 덕목인 나라에서 내가 저지른 짓은 쉽게 용서되지 않았지요. 
 그리고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도 명을 숭상하는 그들의 명분이오. 나는 내 나라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을 치르게 하고 싶지 않았소. 그들의 말대로 명이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운 것은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우리도 우리의 실리를 챙겨야 하지 않겠소? 용의 꼬리가 되느냐, 뱀의 머리가 되느냐 문제였소. 나는 내 나라를 지키고자 명과도 의리를 지키고, 후금과도 잘 지내고자 중립외교를 펼쳤소. 각 나라에 첩자도 보내 동향도 감시했고. 그게 뭐가 잘못된 거요? 그래서 내 재임기간 중에는 전쟁이 없었소. 뒤에 인조 때는 두 번이나 있었지.  마지막으로 대규모 토목공사, 그건 지금도 후회하는 바요. 내 딴에는 시시때때로 위협받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진정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내 콤플렉스를 그런 식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모양이오. 그러나 나도 잘한 게 있소. 허균선생을 시켜『동의보감』을 펴내 백성들의 건강을 살폈고, 땅부자인 지주들의 반발로 결국 흐지부지 됐지만 대동법실시는 백성들한테 박수 받았소.. 이점을 기억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