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과 함께하는 힐링 에세이]
나 내가 생각하는 나
위기를 이기는 용기
김진희(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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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을 춘곤증이라고 한다. 이것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봄을 맞아 신진대사의 기능이 갑자기 활발해지면서 생기는 피로로 질병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 삶에 뜻밖에 들이닥친 위기라고 생각되어지는 순간들은 때때로 더 나은 날을 위한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일 수 있다. 춘곤증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고 본격적인 봄을 즐기게 되듯 삶에 찾아온 위기들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하며 인생의 다음 계절을 맞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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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자는 자신의 기회에서 어려움을 만드는 자요.
낙관자는 자신의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만드는 자다.
- 레기날드 맨셀 -
고대 중국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자연현상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이른바 재이사상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지 않아 자연현상에 따라 통치지를 판단해 왔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조선 초기에 재이사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는데, 태종과 세종에 관한 이야기 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올라 왕권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태종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근심거리가 있었다. 옛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 보면 ‘태종의 비’라는 기록이 발견되는데 태종의 재위시절 유독 잦았던 가뭄에 대한 가슴앓이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왕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려고 했던 태종에게도 자연현상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죽는 날에 비가 오도록 탄원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해마다 그의 기일에는 비가 내렸고 그 비를 ‘태종의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태종의 비’는 그가 가지고 있던 어려움을 대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성군 세종의 재위 시절에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세종이 재위시절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색깔이 누런색이라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걱정을 넘어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보였는데, 정치지도자들에게는 하늘의 뜻을 읽도록 요구했고, 기술자들에게는 하늘의 현상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러한 연구 끝에 놀라운 업적들이 탄생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옥루, 간의 등 과학 기구들이 대거 탄생한 것이다. 덕분에 자연현상을 그저 ‘재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발명품들은 세종을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위기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해야 할 일은 좌절이 아니라 기회로써 멋지게 맞서는 일일 것이다.
절대로 문제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도 과소평가하지 말라
- 로버트 슐러 -
얼마 전에 아기가 걸음마가 늦는다고 조급해 하는 엄마를 만난 적이 있다. 아기를 키워 본 선배로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지만, 마음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길을 걸으며 그 아이와 엄마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두 다리를 보게 되었다. 잘 걷고 뛸 수 있는 두 다리였다. 새삼 그 사실에 놀라웠다. 내 기억 속에 잘 걷게 하거나 뛰게 하는 특별한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잘 걷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걷는 아기는 없다. 걸음을 걷게 되는 시기는 빠른 아기들은 보통 10개월에서부터 늦으면 15개월까지로 개인차가 존재한다. 이 시기가 되기까지 아기들은 목을 가누는 것, 몸을 뒤집는 것, 앉는 것, 기는 것, 서는 것을 순차적으로 습득해 나간다. 신기한 것은 엄마들이 이러한 일들을 위해 아기에게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그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아기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을 넘어지고 또 일어나며 온전히 걷기까지 수천, 수만 번을 넘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아장아장 걷게 된 아기들은 시간이 지나며 다리에 힘이 붙고 능숙하게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이것은 비단 걸음마에서 그치지 않는다. 팔과 손에 힘을 길러 숟가락을 쥐고 스스로 밥을 먹는 일, 음절을 내는 것에서 시작해 단어와 외마디의 말을 거쳐 문장을 말 할 수 있게 되는 일,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일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와 같은 것들을 볼 때 현대 의학으로도 완벽하게 풀어낼 수 없는 인간 설계에 대한 오묘함과 신비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신은 우리에게 살 수 있게 하는 의지와 노력할 수 있는 힘을 본능처럼 부여한 것이 아닐까.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있는 능력들도 스스로 수많은 넘어짐 끝에 자연스럽게 생긴 것들임을 생각하면 지금 닥친 위기에서 넘어져도 반드시 다시 일어나 또 다른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