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경유차에만 엄격한 규제

한국경제신문 정인설 기자

디젤차에서 뒤처진 한국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 때 조금만 잘 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같은 생각은 그냥 만시지탄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가정을 즐겨 하는 편이다. 그것 자체로 흥미로운 일인 데다 다시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시각에서 정부의 경유차 정책을 본다면 아쉬움이 커진다. 일본을 그대로 따라하다 보니 경유차를 그저 매연 덩어리에 가깝게 봤다. 국내 자동차 업계가 수십 년 간 경유차 개발에 소홀했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반면 유럽은 달랐다. 휘발유보다 경유의 미래를 밝게 봤다. 석유가 고갈되면 휘발유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은 적지만 경유의 빈자리를 메워줄 수 있는 대타 요원들은 많다고 여겨서다.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은 디젤차의 고질적 단점인 진동과 소음을 줄였고 강점인 연비는 더욱 강화했다

한국이 독일차 공화국이 된 이유

자연스레 국내 소비자들은 유럽 자동차에 열광하고 있다. 특히 독일차에 푹 빠져 있다. 한국 디젤차가 갖추지 못한 뛰어난 연비와 편안한 승차감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본차와 달리 독일차는 유행에도 발빠르게 대응하는 데서 나오는 강점이다. 여기에 독일차의 세련된 디자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국내 기름값 구조도 독일차 인기에 큰 공을 세우고 있다.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보다 많이 저렴한 상황이 독일차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팔리는 승용 신차 10대 중 1대가 독일차인데 앞으로 독일 독주 체제가 더 강화될 것이란 전망에 이견이 없다. 현대자동차도 국내 시장에서 독일 자동차 메이커를 유일한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

과오를 반복하는 정부

한국이 디젤차 부문에서 다소 뒤처져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또 다시 채찍을 들고 있다. 가장 강경한 곳은 역시 환경부다. 국내차에만 유독 과도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디젤 차량의 배출가스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산차와 수입차에 대해 같은 기준으로 실시하고 있다는 게 환경부 주장이지만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국산차에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수입차는 봐주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수입차에 비해 연비 규제 등에서도 역차별을 받고 있는 국내 완성차 업계가 각종 규제 탓에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부는 2012년 하반기부터 국내에서 판매되는 디젤 신차의 출시 인증 여부를 결정하는 배출가스 시험 기준을 외국과 다르게 적용하고 있다. 기존에는 외부 온도가 상온 범위인 20~30도일 때만 질소산화물이 0.18/이하(8인승 이하 승용차 기준)가 나오는지를 제조사가 자체적으로 시험한 뒤 그 서류를 환경부에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2012년 국내 완성차 업체에 질소산화물 배출량 개선방향이라는 공문을 보내 상온뿐 아니라 영하 7도에서 영상 35도 사이에서도 대기환경보전법이 정한 범위 내의 질소산화물이 나와야 한다고 규정을 수정했다. 또 에어컨을 켠 상태에서도 질소산화물을 측정해 그 결과를 환경부에 보고하게 했다. 환경부는 제조사가 제출한 서류를 보고 대기환경보전법 기준에 맞는지 검토한 뒤 신차 출시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수입차는 과도한 규제 적용서 예외

문제는 이런 바뀐 기준을 국내 완성차에만 적용하고 수입차는 예외로 뒀다는 점이다. 수입차는 유럽 등에서 하는 대로 일반 상온에서 시행한 질소산화물 배출 시험 결과만 제출하게 하고 국산차는 영하 온도뿐 아니라 에어컨을 켠 상태에서도 기준을 통과하도록 요구했다는 얘기다.

국내 완성차 업체 고위 임원은 법이나 시행령이 아니라 환경부 고시로 기준을 바꾼 뒤 국산차에만 적용하고 있다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그 다음 신차를 낼 때도 인증을 잘 해주지 않아 지킬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환경부, 한발 물러섰지만

이에 대해 환경부는 국산차와 수입차를 차별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영하에서 실시하는 저온시험 서류는 거의 받지 않고 있고 에어컨을 켜두고 실시한 시험 결과는 국내외 업체 모두 받고 있다다만 30도 이상의 고온 시험 결과치는 필요한 업체에서만 제출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판매되는 수입차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독일차 업체들의 설명은 다르다. 벤츠와 BMW, 폭스바겐, 아우디 등은 모두 일반 상온 범위인 20~30도에서만 실시한 질소산화물 배출 시험 결과만 환경부에 내고 있다. 한 독일차 업체 관계자는 유럽과 한국 정부에 똑같이 일반 상온 상태에서 시험한 결과로만 인증을 받고 있다만약 한국 정부만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 한국과 유럽연합(EU) FTA 위반 사항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3월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자 환경부는 한발 물러섰다. 환경부는 설명자료를 통해 한국경제신문이 보도한 대로 국내 디젤차의 질소산화물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데 이를 개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유럽 국가들은 저온과 고온, 에어컨 가동을 포함해 실제 도로 조건을 반영한 배출가스 규제를 2017년부터 실시할 예정이며 한국도 동일하게 적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는 한국에서만 과도하게 디젤 차량의 질소산화물 규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유럽이 규제를 강화하는 2017년부터 한국도 유럽 수준의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의미다.

남아있는 역차별 규제

국산차가 불리한 것은 질소산화물 배출 시험만이 아니다. ·FTA에 따라 미국 자동차 업체는 2015년까지 국내 완성차 업계에 비해 완화된 연비와 이산화탄소 규제를 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수입차에 비해 국내 완성차에만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면 결국 국내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