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석유관련 법령 변천사-4

여영섭

산업통상자원부 석유산업과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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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차 전면개정(‘75.7.25.개정, 시행)

2-1. 개정사유 및 주요 개정경과

첫 번 째 전면개정은 1975.7.25. 1973년의 1차 석유파동 이후 국제석유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국내석유급의 안정을 위하여 이루어졌다. 그 주요내용은 석유판매업의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석유사업자에 대한 조정명령 강화, 석유수급에 중대한 지장 발생시 석유배급 등의 조치근거 마련, 석유사업자의 금지행위 규정 등이다. 이 때 만들어진 제도는 석유산업의 경쟁 촉진과 대외경쟁력 확보를 위한 석유산업 자율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1995.12.29.2차 전면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약 20여년간 유지되었다.

이 기간중 이루어진 법령의 주요 개정사항은 1977.12.31. 석유사업기금 설치 및 ‘94.3.24. 동 기금의 에너지 및 자원사업특별회계로의 편입, 1982.12.31.의 석유제품 품질관리 규정 신설유사석유제품의 생산 및 판매 금지 등 유사석유제품 관련 내용의 반영 등을 들 수 있다.

2-2. 주요 사건

. 2차 석유파동

19731974년의 제1차 석유파동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란 회교혁명의 진행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였다. 197810월부터 이란의 정치소요가 유혈폭동으로 발전하면서 12.17. 전면적인 대외 석유수출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는데 자유세계 석유공급량의 15%수준을 공급하던 이란의 수출중단이 주는 충격에 더하여 석유업자들의 원유매점 쟁탈전, 주요 선진 소비국들의 비축용 매입 등이 겹치고 메이커들의 투기성 시장조작이 횡행하면서 석유정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후 원유가격 카르텔의 붕괴와 사우디의 감산조치, 1979년 동절기의 수요증가, 80년의 이란이라크 전쟁 등이 겹치며 원유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981.10.29. 34달러선으로 단일화되어 멈출 때까지 계속되어 1978년말 12.7달러에 비교하여 168%인상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제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였는데 유가는 1979.3월부터 1981.11월까지 7차례에 걸쳐 총 337% 상승하였다. 197811.6%였던 GNP성장률은 19796.4%로 둔화되었고 1980년에는 -4.6%까지 떨어졌다(동력자원부 pp.101-107)

이 때는 원유확보와 국내 석유제품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원유확보, 석유비축 및 정유공장 가동과 관련한 조정명령이 있었다. 원유확보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독자적으로 추진해오던 공시가격의 원유수급이 어려움을 겪게 됨에 따라 정유4사가 정당한 가격으로 원유를 구입하여 정유공장의 정상가동에 차질이 없도록 1980.3.15. 원유확보명령을 내렸다(경향신문 1980.3.15). 석유의 비축과 관련한 조정명령도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먼저, 1977.11.26.에는 석유류 비축량을 60일분으로 늘리도록 하는 조치가 있었고(매일경제 1977.11.29), 1980.6.30.에는 82년까지 일정수준의 원유와 석유제품의 저장시설을 갖추도록 석유의 비축과 저장시설에 관한 조정명령을 내렸는데 저장시설 소요자금의 50%를 비축기금에서 지원하였다(매일경제 1980.6.30). 1984.8.2.에는 정유 5사의 민간비축물량을 26일로 의무화하고 회사별로 의무비축물량을 고시하였으며, 이중 6일분은 석유비축기금에서 융자지원한다고 하였다(동아일보 1984.8.2). 또한, 1979.3.7.1980.10.20.에는 정유공장의 정상가동을 위한 조정명령이 있었다(동아일보 1979.3.10, 경향신문 1980.10.20).

또 원유가격 카르텔 붕괴로 원유가 다원화 현상이 초래되어 획일적인 국내원유관리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정부는 안정기금제도를 통해 원유가평준화제도를 운영하였다. 즉 유가를 정부가 획일적으로 관리하는 체제하에서 원유가격이 다원화될 경우 정유회사별로 이익이 달라지고 결손회사의 가동율이 떨어져 국가 전체적으로 수급불균형이 발생하게 되므로 원유가의 도입가에 정유사별로 차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제2차 석유파동 이후의 물량부족사태에서 소요원유를 최대한 확보하여야 했고 원유를 비싸게 도입하는 것이 정유사의 귀책사유가 아니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원유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원유의 질이 아니라 각 산유국의 정책에 따른 것이며 원유가 비싸다고 해서 이의 도입을 중단시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1981.10.29. OPEC회의에서 원유가격을 질의 차이에 따라서만 차이를 두는 재단일화 즉, 2차 석유파동 직전인 1978년말의 가격차이 수준으로 환원토록 합의, 각국이 19821-2월에 자국산 원유가를 기준원유인 사우디 경질유 가격을 기준으로 인하조정함에 따라 ‘1982.3.11. 폐지하였다(한국석유개발공사 1995, pp.136-140).

한편, 1979.4월부터는 에너지 소비절약을 위한 방안으로 주유소의 영업을 제한하여 새벽 41130분까지의 영업시간을 아침 610시로 단축하였다. 공휴일과 일요일의 영업도 금지하였는데(동아일보 1979.3.30), 1979.6.16.부터는 토요일도 영업금지일에 포함시켰다(동아일보 1979.6.9). 이같은 영업제한은 통금해제에 맞추어 1982.1.5. 해제되었다(동아일보 1982.1.6)

. 석유관련 정책체제의 정비

석유개발공사 설립

석유사업기금 설치

석유사업기금은 유동적인 국제 원유시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여 석유수급 및 가격안정과 석유개발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1977.12.31. 법률개정을 통해 그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실제 운용된 것은 1979.8.23. 시행령 개정이 이루어지고 부터이다. 석유비축은 특별소비세 인상분을 이용할 계획도 있었고, 재정투입없이 민간의 역할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자금부담 및 국제정세 여건으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금의 재원은 석유수입시 징수하는 수입금, 국제원유가격의 현저한 차이로 인해 석유정제업자가 취득한 이윤중 징수하는 수입금 등으로 하고, 용도는 석유의 비축 및 저장시설, 석유개발사업, 원유의 차등가격과 석유제품가격의 평준화로 인하여 석유정제업자에게 발생한 손실의 보전으로 하였다. 초기에는 한국석유개발공사가 이 기금을 관리하였으나 1991.1.14. 법률개정을 통해 동력자원부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변경하였으며 1995.1.1.부터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로 통합되었다.

. 석유제품의 수급조절과 조정명령

60년대부터의 경제개발에 따른 경제규모 확대 및 석탄중심에서 석유중심으로의 에너지 공급 전환에 따라 석유의 소비가 급증하였다. 196512.1%였던 석유의존도는 197150.6%, 197355.0%를 거쳐 197863.5%까지 이르게 된다(석유품질검사소 p.12). 정제시설의 증설도 이루어졌지만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기적인 수급파동 사태를 겪게 된다. 이 시기의 수급은 겨울철의 공급부족에 따른 공급명령, 여름철의 수요부족에 따른 덤핑 등 판매전(경향신문 1978.7.7)이 되풀이 되었다. 2차 석유파동 기간외에도 1974.10.24.의 경질유 무제한 공급지시(매일경제 1974.10.24) 외에, 조정명령도 4차례 있었는데, 1977.1.5.의 유류품귀현상에 대처하기 위한 정유사의 생산의무화 명령(동아일보 1977.1.6), 1988.12.24.의 등유공급 확대명령(경향신문 1988.12.24), 1990.9.30.의 등유재고물량 확보명령(한겨례 1990.9.30) 등이다. 이외에도 1991.1.17.에는 페르시아만 전쟁발발에 따른 유가 인상 및 수급 불안정으로 인한 석유수급 안정 조정명령과 함께 정부비축 등유와 경유를 방출하였다(한겨레 1991.1.17, 매일경제 1991. 1.18). 1983.9.5.에는 나프타 가격 인상후 공급난 심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 해소를 위한 나프타 공급 의무화 물량 배정명령(매일경제 1983.9.5)도 있었다.

한편, 민생유류인 등경유의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1991.11.4. 석유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주유소 등이 3이하의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 판매할 수 있도록 하였고, 1994.6.27. 석유 이동판매소의 운영에 관한 고시(상공자원부 고시 제1994-73)를 제정하여 일반판매소도 이동판매소 설치신고후에 이동판매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가, 2000.7.29.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사전신고제를 폐지하고, 주유소 및 일반판매소의 영업범위에 포함시켰다.

. 가짜석유제품의 출현과 관리제도 정비

석유제품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가짜석유는 석유의 수급상황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휘발유에 석유를 섞어쓰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있었고(동아일보 1939.5.3) 50년대 초반에는 가정용 등유에 휘발유를 섞어서 파는 경우도 있었다(경향신문 1953.2.8). 1971년에는 휘발유에 석유 또는 솔벤트를 섞어서 파는 가짜석유가 많이 나타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1971.11.2.부터는 유종별 착색제(고급휘발유 적색, 보통휘발유 담홍색, 경유 녹색)를 도입하였다(매일경제 1971.11.2). 1974년에는 제1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휘발유 가격이 크게 오르자 솔벤트를 연료에 섞어 쓰는 솔벤트 택시가 등장하였다(경향신문 1974.7.25). 1978년 국세청의 일제조사결과에서는 조사대상 주유소의 27.8%에 해당하는 주유소가 가짜휘발유를 판매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78.4.5). 그러나, 이 시기에는 석유제품의 품질관리가 공산품 품질관리법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석유사업법에서는 가짜석유 취급에 대한 명문적 금지규정 없이 판매를 목적으로 석유의 품질을 저하시키거나 저하시켜 석유를 판매하는 행위만 금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법원에서는 솔벤트 등을 혼합하여 판매하여도 품질에 변화가 없고 휘발유로 속여서 팔지 않았다면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대법원 1978.1.31. 선고772557 판결)하는 등 가짜휘발유 단속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1.1.10. 석유류제품의 규격에 관한 조정명령을 발동하여 법정규격에 위반되는 석유류제품의 생산 및 판매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처벌 및 행정제재의 근거를 마련하였다(매일경제 1981.1.12). 1982.12.31.에는 석유사업법을 개정(‘83.5.1. 시행)하여 석유제품의 품질유지 및 검사업무, 유사석유제조 및 판매 금지의 법적근거를 신설하였고, 뒤이어 석유제품의 품질관리업무를 담당할 석유품질검사소를 설립하였다(1983.11.7. 설립허가, 11.15. 설립등기, 한국석유품질검사소 pp. 41-49). 또한, 검사의 방법과 기준을 반영한 석유제품의 품질검사 방법 및 검사수수료의 징수시기징수방법에 관한 사항을 고시하고(동력자원부 고시 제84-5, 1984.2.29), 석유제품의 품질검사에 관한 업무를 석유품질검사소에 위탁함으로써(동력자원부 공고 제84-3, 1984.2.29) 가짜석유 단속을 위한 제도와 단속체계를 모두 갖추게 된다. 또한, 1982.1.1.부터 특별소비세 과세물품에 유사휘발유를 포함시켰으며 유사경유는 1999.12.3.부터 포함하여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985.1.22.에는 용제유통구조관련 조정명령을 발동하여 용제판매 대리점은 등록된 실수요자에게만 용제를 직매하도록 하고 거래상황을 용제 제조회사를 통하여 보고하도록 한데 이어(한국석유품질검사소 pp.160-161) 1985.3.12. 석유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신고대상이었던 용제제조업과 판매업을 허가대상으로 전환하였다. 1985.4.25.부터는 가짜석유 신고자에 대한 포상제도 실시하였다(매일경제 1985.5.25). 1985.8.7. 동력자원부가 감사원과 합동으로 부정휘발유 단속을 실시하고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주유소 2,350개중 표본대상 120개소 조사결과 이중 25%30개소가 부정휘발유를 만들거나 판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동아일보 1985.8.7).

이 같은 가짜휘발유의 유통을 뿌리뽑기 위해 주유소가 대리점을 거치지 않고 정유사와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하고 유통과정의 품질관리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특정 정유사의 상표를 내건 주유소는 그 회사의 제품만 팔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3개 유통업계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고 정유사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엇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매일경제 1985.9.17).

한편, 서울시가 서울시내 주유소를 대상으로 실시한 품질검사결과 조사대상 270개중 46개 주유소의 휘발유가 납함량과 황성분이 기준치를 넘어 불량유 취급판정을 받았다. 이에 대해 유통업계에서는 정유회사가 출고전 사전검사를 자체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고 실질적 검사는 판매과정에서 사후검사만 하게 되어 있어 불량유류 유통에 대해 주유소만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정유사와 주유소의 사전 및 사후검사 실시 등의 조치를 요구하였다. 정유사는 유류 정제과정은 문제가 없으나 유통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정유사와 주유소가 계열화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 불량유가 어느 회사 제품인지 확실치 않으므로 책임을 지기 어렵다고 주장하였으나(동아일보 1985.5.21, 경향신문 1985.5.22) 이 사건을 계기로 불량휘발유의 유통을 근절하기 위해 정유회사 생산제품에 대해 사전검사를 받도록 하였다(매일경제 1985.5.22)

. 석유제품의 정량 판매

석유 유통시장은 가짜석유 유통과 함께 정량미달 판매가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가짜석유 단속체계와 비슷한 시기에 법률로서 정량판매를 의무화하게 된다. 1982.12월에 한국소비자 연맹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시내 석유 실량검사결과 주유소 및 부판점(일반판매소)에서 판매되는 석유의 76%가 정량에서 모자라고 법정 용기를 사용하는 업소는 거의 없으며 주유소의 자동계량기도 정량을 측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매일경제 1983.1.20). 이에 따라, 1982.3.10.에는 석유판매업자의 석유제품 정량거래를 위해 법정계량기를 의무화하는 석유판매 법정계량기 의무화조정명령을 발동하였고(동아일보 1982.3.10), 1982.12.31.에는 정량에 미달하여 석유를 판매하는 행위를 법률에서 정하는 금지행위로 규정하여 ‘1983.5.1. 시행하였다. 이 때까지는 석유사업법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고 계량법에서 법정계량기를 사용하도록 하고, 상품의 오차를 초과하여 계량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석유제품 거래에 이용하는 계량기도 오차범위를 규정하고 있었다. 1994.1월에는 석유류 정량거래 시행지침을 고시(상공자원부 고시 제1994-1, 1994.1.7)하여 등유나 경유를 배달판매할 때 검사기관의 검정확인을 받은 눈새김 계량용기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눈금표시가 없거나, 규격이 일정하지 않은 배달용기를 이용해 정량미달판매를 하는 부작용이 많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한겨레 1994.1.7).

. 석유판매업 허가제로의 전환

 

허가기준의 설치

석유사업법1차 전면개정시 석유판매업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하고, 허가요건도 강화하였다. 대리점의 경우 서울특별시·경기도는 저장시설 1500킬로리터 이상, 수송장비 100킬로리터 이상, 자본금 1억원이상, 그 외의 지역은 저장시설 700킬로리터 이상, 수송장비 50킬로리터 이상, 자본금 5천만원 이상이었고, 주유소의 경우 서울특별시는 저장시설 40킬로리터 이상, 주유기 4대 이상, 그 외의 지역은 저장시설 20킬로리터 이상, 주유기 2대 이상으로 하였다. 이같은 허가요건의 강화는 판매점의 난립으로 인한 경영악화가 계속됨에 따라 판매점의 신설억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중 대리점의 허가기준에 대해서는 1997.1.1. 지역구분을 폐지하고 저장시설 700킬로리터, 수송장비 50킬로리터 이상, 자본금 1억원 이상으로 개정하였다.

석유판매업 허가권자의 허가기준

주유소의 허가제 실시와 함께 서울시에서는 강남지역에 한해 허가하고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는 경우도 강남지역중 도심반경 5밖으로 국한하였으며 강화된 시설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주유소는 모두 허가취소하기로 하였다(경향신문 1976.3.29). 1983.6.15. 시행령 개정시에는 석유판매업 허가관청이 동력자원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서 지자체별로 석유판매업 허가기준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1984.6.11. 주유소의 허가기준 및 절차에 관한 고시(서울시 고시 제343)를 제정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고덕가락개포목동지구 등 4개 신개발지역에서의 주유소 신규 허가와 여의도지역으로의 이전허가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주유소간 거리제한을 1로 규정하였다가 1989.2.2. 700m로 완화하였다(서울시고시 제45). 1991.11.4.에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거리제한을 더 완화하고(서울시 350m, 직할시 및 시읍지역 500m, 그 외의 지역은 1,000m 이내의 범위에서 따로 정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함. 이에 따라 서울시도 거리제한을 350m로 완화) 지자체별 주유소 허가기준의 근거를 폐지하였다. 이후 1993.11.15. 다시 시행령 개정으로 주유소간 거리제한을 폐지하면서 지자체의 주유소 허가기준 근거를 다시 부활시켰다.

. 상표표시제 실시

주유소의 상표표시제는 주유소가 특정정유사의 이름을 표시해 놓고 그 정유사의 제품만을 판매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주유소가 정유사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여 주유소 업계가 대대적으로 반발하는 등 도입초기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주유소와 정유사의 사적계약에 따라 운영되던 것을 제도화한 것은 불량 석유제품 유통, 가짜석유제품의 만연에 따른 품질관리 필요성(동아일보 1985.5.21, 경향신문 1985.5.22, 매일경제 1985.9.1), 가격이 자유화되어 정유사간 가격경쟁이 벌어져도 가격 인하효과가 소비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주유소의 마진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한겨레 1991.11.6). 정유사와 석유판매업자간의 제품취급 및 상표표시 문제는 1981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정유사와 대리점간 공급계약에 대한 시정명령에서 시작되었고, 1992년에는 주유소의 상표표시제가 도입된 후 수차례의 제도 변경이 있었다.

일반대리점의 복수정유사 제품 취급 허용(공정거래위원회 시정명령)

석유류 판매점과 정유회사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는지 여부를 가려주도록 석유유통협회가 심사를 의뢰한 것에 대하여 1981.8.24. 공정거래위는 정유사와 석유판매업자간 공급계약 시정명령을 내렸다(공정거래위 81-07, 1981.8.24). 이 명령은 품질관리 유지상 불가결한 경우 제조업자의 영업권 상표권 상호등 고객에 대한 신용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우 상품의 안정적 공급이 필요한 경우 불황이 극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리점이 여러 제조회사 제품을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현재 정유사가 대리점과 판매계약을 맺을 때 10년간 자사제품만 팔도록 구속하는 행위는 부당배타조건부 거래로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위반된다고 의결, 앞으로는 1년간만 허용하고 1년후에는 대리점이 정유회사를 선택, 판매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하였다(동아일보 1981.8.25, 경향신문 1981.8.25).

공급자 표시제도(단일상표 표시제) 도입(1992.4.1)

공급자 표시제도(단일상표제)는 주유소가 1개만의 정유사와 거래하고 그 상표를 표시하도록 한 것으로 1985년부터 불량 석유제품 유통, 가짜석유제품 유통의 만연에 따른 품질관리 필요성 및 1988년 유가 자율화 검토와 함께 다시 도입방안이 검토되었다(매일경제 1988.5.27). 이후 1990.8.30. 도입방안을 확정한 후(경향신문 1990.8.30) 1991.9월 유가자유화에 이어 1992.4.1.부터 시행되었다. 단일상표제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주유소 등 석유판매업에 있어서의 공급자 표시제도에 관한 불공정 거래행위의 유형 및 기준(공정위 고시 제1992-1)의 제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특정 정유사의 제품을 판매하면서 다른 정유사의 상표를 표시하는 행위 금지 서로 다른 정유사의 제품을 교체 또는 혼합하여 판매하면서 특정 정유사의 상표를 표시하는 행위 금지 하나의 영업장소에 서로 다른 정유사의 상표를 표시하는 행위 금지 정유사가 다른 정유사의 제품을 공급받거나 외국 석유제품을 수입하여 공급하는 경우 자기제품의 품질수준에 미달되는 제품을 판매하면서 자기상표를 표시하는 행위 금지 기타 실제 판매하는 석유제품과 다른 상표를 표시광고하거나 소비자를 기만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제도정착을 위해 동력자원부는 주유소 등 석유판매업소에 대한 상표표시제 시행에 관한 지침’(1992.1.30)을 배포하고 제도시행을 추진하였는데 92.4.1.부터 3개월간 지도계몽을 실시하고 ‘92.7.1.부터는 단속 및 처벌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유소 사업자는 국내정유사들의 제품의 품질성상이 거의 동일하여 정유사들이 상호교환판매를 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전제로 한 상표표시제는 정유사에 대하여만 제품을 마음대로 교환판매할 자유를 주고 주유소는 일정기간동안 특정정유사에 예속되는 결과만을 초래하는 조치로서 이는 주유소 사업자들의 헌법상 보장된 영업의 자유, 경쟁의 자유를 제한하고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이 심판청구를 각하하였다(1992헌마157, 1995.4.20)

상표표시제(복수상표 표시제)로 전환(2001.9.1)

복수상표 표시제는 한 주유소에서 저장시설과 주유기를 공급자별로 구분설치하여 2이상의 상표제품을 판매하거나 상표제품 또는 비상표제품을 함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1992년 단일상표 표시제 도입 및 90년대 중반이후의 석유산업 자유화로 주유소업계, 후발 정유사, 수입사 등을 중심으로 석유제품 상표표시제의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고유가 지속으로 언론시민단체시장주체간에 상표표시제를 개정하여 시장기능에 일임하자는 요구가 잇따르자 2001.3.23 경제정책조정회의 협의를 거쳐 상표표시제를 사적계약방식으로 변경하기로 하였다(산업자원부 보도자료 2001.8.30). 복수상표 표시제는 석유사업법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서 함께 규정하였는데 석유사업법 시행령에서 복수폴 주유소는 저장시설과 주유기를 석유제품 공급자별로 구분하여 설치토록 하고 상표제품과 비상표제품을 함께 판매하는 주유소는 비상표제품을 판매하는 주유소임을 표시하도록 개정하였다(2001.8.25). 또한, 주유소 등 석유판매업에 있어서의 공급자에 관한 부당한 표시광고행위의 유형 및 기준을 개정하여 복수의 정제업자 석유제품을 판매하는 경우는 각 석유정제업자의 상표를 명확히 구분하여 표시하도록 하였다(공정위 고시 제2001-2, 2001.4.10). 그러나, 표시방법을 따로 정하지 않고 자율로 표시하도록 하자 대부분의 주유소가 상표제품과 비상표제품을 함께 판매한다는 점을 표시하지 않고 외관상 상표제품만을 판매하는 것으로 표시하고 실제는 비상표제품을 함께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산업자원부는 주유소 비상표제품등의 표시기준 및 표시방법을 고시(산업자원부 고시 제2003-53, 2003.8.6)하여 표시방법을 규정하게 된다.

상표표시제 폐지(2008.9.1)

2008.9.1.부터는 상표표시제를 폐지하였다. 폐지 이후에는 특정 정유사의 상표를 게시하였다고 하더라도 혼합판매 사실을 주유소에 표시할 경우 타 정유사의 제품 판매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상표표시제가 정유사와 주유소간 배타조건부 거래를 사실상 조장하고, 정유사간 제품교환으로 상표표시제의 실효성이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공정거래위 보도자료 2008.6.19). 이 조치에 따라 주유소 등 석유판매업에 있어서의 공급자에 관한 부당한 표시광고행위의 유형 및 기준을 폐지하였고(공정위 고시 제2008-9, 2008.7.11) 부당한 표시광고행위의 유형 및 기준 지정고시를 개정하여(공정위 고시 제2008-10, 2008.6.18) “제조자 식별이 곤란한 제품을 다수의 사업자로부터 구입판매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사업자가 공급한 제품만을 판매하는 것처럼 그 사업자의 상표 또는 상호를 표시광고하는 행위를 부당한 행위로 규정하고 그 예시로 주유소에서의 표시사례를 반영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혼합판매사실을 표시하면 타 정유사의 제품도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산업자원부의 주유소 비상표제품등의 표시기준 및 표시방법도 폐지하고(산업자원부 고시 제2008-10, 2008.6.18) 석유사업법 시행령에 규정된 저장시설과 주유기의 석유제품 공급자별 구분 설치 및 상표제품과 비상표제품을 함께 판매하는 주유소의 비상표제품 판매 주유소 표시 의무화 규정을 삭제하였다(시행령개정, 2009.4.30)

전량구매계약 강요 금지(2012.)

2012.4월에는 석유제품시장의 경쟁촉진을 위하여 석유제품시장 경쟁촉진 및 유통구조 개선방안을 추진하였다. 추진과제중 하나로 혼합판매의 활성화와 전량구매계약의 강요를 제한하기 위하여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서 금지하는 불공정행위를 심사하는 기준인 불공정거래행위 심사지침석유정제업자가 주유소 등 석유판매업자의 의사에 반하여 석유제품전량구매를 강제하는 등 석유판매업자가 경쟁사업자와 거래하는 행위를 사실상 금지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행위를 불공정행위의 유형인 구속조건부 거래의 예시사항의 하나로 반영하였고(공정거래위원회 예규 제134, 2012.4.25) 부당한 표시광고행위의 유형 및 기준 지정고시를 개정하여(공정위 고시 제2012-10, 2012.5.1) 상표 또는 상호를 부당하게 표시광고하는 사례로 반영되어 있던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혼합판매표시 없는 주유소의 혼합판매가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보도록 하였다.

정유사의 제품교환

주유소에 대해서는 제품과 표시광고가 일치하도록 관리해 왔으나 정유사의 경우에는 상호간 제품교환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1969.4월 호남정유는 공장가동을 앞두고 1968.10.15.부터 석유공사의 제품을 이용하여 미리 시장에 진입하였다(매일경제 1968.10.24). 경인에너지는 1972.4.17. 준공후 1972.10월이 되어서야 증설후에 휘발유를 생산하였는데(매일경제 1972.4.17, 1972.4.25) 주유소 확보를 통한 시장진입은 1972.6.19.부터였으므로(매일경제 1972.6.19) 휘발유를 생산할 때까지는 유공 또는 호남정유가 생산한 휘발유를 공급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3.2.19.에는 유류 수송비의 절감과 수송상의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요처 개발은 각 정유사가 따로 하되 유류공급은 각 지역을 분담하여 가까운 정유사가 일괄공급하는 지역분담제를 합의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73.2.19). 그 이후에도 정유사간의 제품교환이 꾸준히 이루어졌다는 것은 여러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매일경제 1981.3.11, 매일경제 1996.4.21).

이같은 제품교환은 제도적으로도 인용되었는데 1972.8월부터 실시한 석유제품의 전국균일 최고가격제 도입시에 정유회사 상호간 제품교환을 검토하였고(경향신문 1972.7.22) 1992년의 단일상표 표시제 도입시에도 정유사의 제품교환시 자기제품의 품질기준에 적합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자기품질에 맞으면 타사제품을 자기상표로 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사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5.6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및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정제업자 또는 석유수출입자 상호간의 공급량에서 공급받은 양을 차감한 양이 전년도 생산량의 1% 이하의 범위내에서 상호간 석유판매행위를 허용하였다가 2009.1.30. 법률개정으로 석유사업자간 수평거래를 허용되면서 이 제한규모도 폐지하였다.

. 가격제도의 변화

1969년부터 운영해오던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는 수송거리에 따라 지역별로 차등을 두고 운영해 왔는데(상공부 고시 제4389, 1969.2.11), 1972.7.21. 석유가격을 인상하면서부터는 지역별 가격차를 없애고 전국균일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게 된다(상공부 고시 제8915, 1972.7.21). 이 같은 전국 균일 최고가격제는 1988.6.8. 유가 조정시 고시내용중 수송비 별도 고시를 폐지(동력자원부 고시 제88-23, 1988.6.8)할 때까지 운영되었다(동력자원부 p.156). 가격자유화는 정부가 1982년 유가자율화시안을 발표하고(경향신문 1982.3.31) 1983년부터 시작하였는데, 먼저 항공유와 용제를 1983.2.6.부터 고시대상에서 제외하여 자유화하였다(동력자원부 고시 제83-4, 1983.2.5). 나프타의 가격은 1985.4.1.부터 일본 C&F가격과 연동하였는데 초기에는 분기별로 조정하다가 1985.11월부터 매월단위로 조정하였으며 1989.3.27.부터는 이를 삭제하여 자유화하였다[(동력자원부 고시 제84-32, 1984.11.24), (85-209, 1985.10.17), (89-15, 1989.3.27)]. 또한, 아스팔트는 1988.11.2.부터, 고급휘발유 및 군용휘발유는 1989.3.27.부터 고시대상에서 제외하여 자유화하였다[(동력자원부 고시 제88-42, 1988.11.2), (89-17, 1989.3.27)].

91.9월부터는 석유류 가격자유화 시행에 따른 관리지침을 제정(동력자원부 고시 제91-46, 1991.8.31)하여 휘발유와 등유의 고시가격을 삭제하고 업계 자율로 가격을 결정하도록 하였는데 동력자원부에서 내부 가격 관리기준을 운영하면서 상하 3%내에서 가격을 조정하도록 관리하였다(매일경제 1991.8.28).

이 시기에 맞추어 석유류 가격표시제 실시요령을 고시(동력자원부 고시 제91-47, 1991.8.31)하여 주유소와 일반판매소의 입구에 가격을 게시하도록 하였고, 1997년부터는 유가 자유화에 맞추어 가격표시판 제도를 다시 강조하였으며 1997.3월부터는 위반사업자에 대하여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였다(동아일보 1997.1.17)

1994.2.15.부터는 국제원유가 및 환율변동에 따라 국내유가를 자동조정하여 매달 15일 고시하는 유가연동제를 실시하였는데, 이 유가는 미리 정해진 산정공식에 따라 대한석유협회가 유가를 산정하고 정부의 확인을 받은 후 발표하는 방법으로 운영되었다(매일경제 1994.2.15). 같은해 9.15.부터는 국제시세(싱가포르 석유제품의 본선인도가격)에 연동하는 방법으로 전환하였으며 가격고시도 매월 15일에 하던 가격고시를 11월부터는 매월 1일 고시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다(한겨레 1994.9.10).

1997.1.1부터는 유가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제도의 조기정착을 위해 시행초기에는 가격 사전보고제와 유가동향 모니터링 및 소비자보호센터 설치 등 보완책을 마련하였는데, 사전보고제는 초기 6개월동안에는 휘발유등유경유의 3개 유종을 사전보고하고 7월부터는 사후보고하도록 하였다. 유가동향 모니터링은 휘발유등유경유벙커-C유 등은 정유사, 대리점, 주유소를 대상으로 석유개발공사가 매주 조사하여 물가정보지 등을 통해 공표하는 것이다(매일경제 1996.12.18). 1998.2월부터 사전보고제가 폐지되면서 유가는 완전 자유화 되었고 정유사들은 사전 행정절차없이 독자적으로 가격변동 요인을 산정하여 그때마다 가격을 올리고 내릴 수 있게 되었다(동아일보 1998.1.18). 그러나 실제 정유사들은 그 이후에도 자체적으로 매월 석유가격을 고시하였고 2003.1월에 이르러서야 매월 고시없이 수시로 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동아일보 2003.1.22)

. 석유제품 관련 조세제도의 변화

1962.1.1.부터 석유류세 제도로 운영해 오던 석유제품에 대한 조세는 1977.7.1. 부가가치세 제도 시행과 동시에 특별소비세로 전환하였으며, 2008.1.1.부터 개별소비세로 변경하였다. 1994.1.1.부터는 휘발유와 경유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10년간의 기한을 정하고 한시적 목적세인 교통세로 전환하였다가 2004.1월에 3년 연장조치를 하였으며 2007.1.1. 교통에너지환경세로 개정한 후 2009.12.312013.1.1. 두차례 시한을 연장하여 2015.12.31.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 조세는 각 유종에 대한 세율을 법률에서 정하고 세율의 100분의 30의 범위안에서 대통령령으로 조정할 수 있는 탄력세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 정유사의 시장경쟁

 

휘발유 상표전쟁

1981.6월부터는 정유사간 휘발유 상표를 둘러싸고 치열한 판매전이 벌어졌다. 호남정유가 1981.6.1. ‘CXI 3’이라는 브랜드를 붙인 휘발유의 시판을 시작하자 유공이 뉴슈퍼’, 경인에너지가 하이파워 76’이라는 브랜드를 출시하고 대대적으로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이에 대해 각계의 비판이 일자 1981.6.16. 대한석유협회의 주선으로 과열경쟁의 자제 합의(매일경제 1981.6.16, 6.17), 6.24. 시장쟁탈전 재발 후, 7.26. 일체의 과당경쟁을 중지하기로 다시 합의하였다(동아일보 1981.6.26, 매일경제 1981.7.27).

이 같은 과열 판매경쟁은 각 정유사들이 결국 수백억원의 손해를 보고 끝났는데, 이 후유증은 정유사들의 자금압박으로 이어져 주유소에 대한 자금지원의 중단 및 정유사들의 담합에 의한 고시제 현금판매제 실시, 거래조건 악화로 대리점들의 경영난까지 초래한 석유업계의 큰 사건으로 받아들어지고 있다(석유유통협회 pp. 132-133)

휘발유 품질(옥탄가) 전쟁

1989. 4월에는 쌍용정유가 가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보통휘발유의 옥탄가를 고급휘발유 수준인 95로 대폭 올리고 판촉활동에 들어가면서 품질 가격경쟁이 시작되었다(매일경제 1989.4.4). 이에 대응하여 타 정유사도 보통휘발유의 옥탄가를 높이거나 휘발유의 가격을 내렸고(동아일보 1989.4.5) 쌍용정유는 다시 고급휘발유의 옥탄가를 95에서 97로 올리는 한편 등유의 황함유량을 대폭 낮추어 판매하는 등(동아일보 1989.4.8) 고급화 전략을 추진하였다. 이 상황은 결국 동력자원부가 개입하여 자원낭비를 이유로 휘발유의 옥탄가는 91수준이 적당하다고 조정하고 각 정유사들이 이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매일경제 1989.4.19).

1994.4월부터는 휘발유 품질과 가격을 둘러싼 판매경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쌍용정유가 89년의 1단계 품질고급화에 이어 2단계 품질고급화조치라고 주장하면서 4.27. 휘발유의 옥탄가를 95에서 97로 올리고 가격을 낮추었다. 이에 대해 나머지 4사는 옥탄가 97이 국내 자동차 성능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일시적인 가격인하와 함께 고객서비스의 명분하에 변칙적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을 노리고 있다고 지적하고(매일경제 1994.5.1) 쌍용정유의 조치에 정면대응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쌍용정유 계열 주유소 인근의 타 주유소에서는 공급사의 결정과 관계없이 쌍용정유 수준으로 가격을 인하하는 현상이 확산되었고 이같은 쌍용의 움직임에 대해 정부가 제동을 걸자, 시장경쟁원리를 도외시하는 발상이라는 여론도 있었다(매일경제 1994.5.3). 그러나, 경인에너지, 호남정유, 현대정유도 각각 5.3. 5.4. 0시를 기하여 쌍용정유보다 더 큰 수준의 가격인하를 발표하였다(동아일보 1994.5.5). 이 같은 가격인하경쟁은 6월에 들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매일경제 1994.6.15) 7월부터는 다시 주유소 쟁탈전으로 넘어가게 된다(매일경제 1994.7.21).

주유소 쟁탈전

석유제품은 그 품질이 균일하고 표준화되어 있어서 다수의 유통경로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경쟁수단이다. 따라서 각 정유사는 주유소 확보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이같은 현상은 수요감소로 인한 경쟁의 가열시기는 물론, 정유사의 신규 시장진입, 휘발유 상표전쟁, 두차례의 휘발유 품질(옥탄가) 경쟁, 주유소 설치제한 완화시기 등 시장에 충격을 주는 요인이 발생할 때에 더욱 크게 벌어졌는데 그중에서도 1993.7.26. 현대의 극동정유 인수, 정유4사에 대한 증설허용(매일경제 1993.8.29), 1993.11월의 6대도시 주유소 거리제한 폐지가 겹쳤던 시기에는 이른바 폴전쟁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치열한 주유소 쟁탈 경쟁이 벌어졌다.

1993.11월 주유소 거리제한 폐지로 촉발된 주유소 쟁탈전, 1994.4월부터의 휘발유 가격전쟁후 1994.7월부터는 현대정유가 주도하는 직접적인 주유소 쟁탈전이 시작된다. 5월이후의 주유소와 정유사계열 대리점간 거래계약 갱신기간중 현대는 108개의 주유소를 신규로 확보하였다(매일경제 1994.7.22). 이중에는 유공의 대리점이었던 미륭상사, 쌍용정유의 대리점이었던 우림석유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둘러싸고 공정거래위의 조사와 법정다툼은 물론 주유소의 상표표시 교체를 둘러싸고 직원들간의 몸싸움까지 벌어질 정도로 다툼이 치열했다. 이같은 현대정유의 대리점과 주유소 유치과정에는 대규모의 자금지원이 있었다고 하였다(한겨레 1994.7.26)

이 같은 유치행위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를 실시하고 미륭상사와 현대의 계약이 지원금의 규모로 보아 부당고객 유인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현대정유에 시정명령과 2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였다(공정거래위원회 의결 제94-301, 94-302, 1994.9.28). 이에 대해, 현대정유가 불복하고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1심 판결에서는 이들의 계약이 정당하다고 하였으나(매일경제 1994.10.19) 2심에서는 무효라고 판결하였다(매일경제 1995.1.14). 그 후 미륭에서는 유공과 계속 거래를 하겠다고 입장을 바꿈으로서 약 2년만에 원상회복하면서 마무리 되었다(매일경제 1996.7.11).

우림석유는 쌍용의 어음기간 단축, 무담보 여신한도 축소조치로 쌍용정유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계약을 해지하고 현대정유와 계약을 체결하였는데(매일경제 1994.9.12) 이에 불복한 쌍용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쌍용과 우림석유의 계약해지가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결하였다(매일경제 1995.10.21).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사태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우림석유에 대한 쌍용의 어음기간 단축, 일방적 유류공급물량 감축행위(‘93.12’94.8월간) 등이 부당하다고 보아 시정명령을 하고 2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였다(공정거래위 의결 제94-308, 94-309, 1994.10.12).

쌍용정유와 호남정유간에도 1995년부터 주유소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이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남에 따라 통상산업부에서 특별조사를 실시하고 정유사에 대한 벌금부과를 하기도 하였다(매일경제 1995.8.26, 한겨레 1995.11.6). 치열한 다툼 끝에 양 사는 정유업계 사장단 회동을 계기로 법원에 제기했던 상호간의 폴싸인 철거 및 석유제품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철회하고 상대방의 판매망을 인정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한겨레 1995.11.6, 매일경제 1996.5.1).

. 주유소의 증가

1972.6월의 신규 대리점 및 주유소의 허가 중단조치1970년 이후 1980년까지의 주유소 수는 1,500개가 채 되지 못하는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81년 정유사의 신규 직영대리점 및 직영주유소 설치를 금지하고 자영석유대리점 및 주유소의 신규허가 억제방침을 해제한 3.14조치 이후 주유소의 수는 증가하기 시작하여 19801,465개에서 19903,315개까지 10년간에 걸쳐 2배가 넘게 증가한다. 이후 19913,382개에서 199810,012개로 7년간은 3배 가까이 될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는데 이는 1989년 및 1991년의 거리제한 완화, 1993.11.15. 서울시 및 직할시의 거리제한 폐지, 1995.11.8.의 전국적 거리제한 폐지로 이어지는 주유소 설치 규제완화에 따른 것으로 이해가 된다. 1999년 이후는 다시 증가폭이 줄어들어 완만한 증가세로 2012년말 현재 12,800개 수준에 이르고 있다.

. 석유유통시장에서의 경쟁

석유제품시장에 있어 정유사와 대리점, 주유소 간의 다툼과 협조가 되풀이 되는 현상은 여전했다. 때로는 정유사간, 대리점간, 주유소간 경쟁과 담합도 있었고, 때로는 정유사와 판매사간, 대리점과 주유소간의 경쟁과 담합도 있었는데, 주유소를 중심으로 업역간 분쟁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확인해 본다.

정유사와 판매업자

전편에서 보았듯이 1970년대 초반에도 정유사의 경쟁에 의한 대리점과 주유소의 과잉설립, 정유사의 직판 확대, 정유사 직할대리점의 설치와 활동, 직영주유소에 대한 직매 등으로 인한 일반대리점과 주유소의 판매시장 위축, 엷은 유통마진 등으로 인한 대리점과 주유소 도산의 속출 등이 있었는데 1975년 이후에도 이 같은 현상은 되풀이 되었다. 주유소는 정유사가 자영주유소에 대해 공급물량을 감축하고 직영 판매망과의 공급가액 차이 등으로 자영주유소들을 어렵게 한다고 하고 불필요한 대리점 제거 등을 통해 단일마진제 실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영업시간 단축을 결의하기도 하였다(매일경제 1975.7.16)

정유사와 판매업 분리(3.14 조정명령)

정유사의 유통분야 잠식으로 인한 문제점이 나타나자 석유판매업계에서는 정유사의 활동자제를 요청였는데 석유의 생산과 판매를 분리하는 형태의 유통구조 개편 시도가 자주 등장한다. 1974년 정부에서 검토한 유류유통규조 개편방안과 한국석유산업회사의 설립방안, 한국석유개발공사의 설립방안, 1976년 정유사의 유통부문 분리 방침 발표, 1977년 주유소 협회가 추진했던 공동판매기구의 설치 등이 그 사례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981.3.14.에는 정유사의 신규 직영대리점 및 주유소의 설치를 금지하는 유통질서 확립 조정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정유사의 시장지배가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정유사의 직영대리점 및 주유소의 시장지배율이 전체 물량의 76.2%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경향신문 1981.8.6), 정유회사의 직판물량이 크게 늘어나 유통업계의 존립기반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경영난에 빠진 기존대리점을 정유사들이 인수하고 있다는 주장(매일경제 1982.11.11), 정유사가 유통시장에 파고들어 대리점과 주유소를 계속 인수하고 있다는 주장(매일경제 1983.6.21), 정유사의 덤핑 등 치열한 판매경쟁으로 군소대리점들이 극심한 타격을 입고 경영권이 정유사로 넘어가고 정유사 직영대리점은 주유소 및 일반판매점 등을 인수하여 판매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지적(매일경제 1984.1.20), 정유사들이 대리점 운영을 할 수 없도록 하였음에도 타인 명의로 위장하여 인수하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매일경제 1984.5.26)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유사의 판매시장 잠식을 막고자 했던 3.14조정명령으로도 가시적인 사정의 변화는 없었던 것 같고 오히려 1989년에 이르러서는 유공이 주유소를 취득한 것으로 고발되어 동력자원부가 시정명령을 내린 것을(매일경제 1989.3.2) 계기로 3.14조치를 둘러싸고 업계에 많은 논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이 조치는 약 10년이 경과한 1991.9.1. 해제되었다.

대리점 폐지 또는 주유소 대형화 주장

1973.6월 유류제품 가격의 인상이 계속되자 주유소협회가 국내 유류제품가격의 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유통과정에서 대리점을 배제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고 1977년에도 주유소가 대리점의 덤핑방지 및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정유사로부터 직접 공급받을 수 있는 대형판매기구의 설치를 추진하였다. 이 같은 대리점 폐지 주장은 그 뒤에도 되풀이 되었는데 동력자원부가 소비자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 유가제도 개편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공장도 대리점 주유소의 3가지로 구분하여 결정하고 대리점과 주유소에 각각 34%의 마진을 주도록 유가를 조정해 왔던 석유류 가격을 앞으로는 공장도 가격와 소비자가격만 지정하여 중간이익을 없애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대해 대리점들이 대리점의 기능을 무시한 것이라고 반발하여 가격개편을 보류하자 이번에는 주유소측에서 대리점의 폐쇄를 주장한 것이다(경향신문 1981.11.27).

또한, 1973년 일반주유소를 통합하여 대단위화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977년에도 주유소의 대형화를 위해 공동판매기구를 추진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1994년에도 주유소 차원에서 업소난립에 따른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5-10개의 주유소를 한데 묶어 운영하는 체인화를 추진하였다. 이는 당시의 유가구조하에서 1개 주유소당 월평균 3천드럼 이하의 판매물량으로는 적자를 면치 못하므로 신설 또는 영세업소를 빌리는 방식으로 주유소수를 늘려서라도 월평균 최소한 1만드럼 이상을 판매해야 채산성을 맞출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매일경제 1994.8.13).

. 담합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1981.4.1. 시행된 이후 이 법은 석유정제업자를 비롯한 석유사업자들의 거래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업자간에 치열한 다툼을 벌인 후 협의를 통해 마무리하던 그동안의 관행은 부당한 공정행위로 지목되어 시정명령의 대상이 되고 과징금을 부과받거나 검찰에 고발되기도 했다. 석유사업자들에게 부과된 공정거래위 시정명령중 주요한 결정은 정유사와 석유판매업자간 공급계약 시정명령(공정거래위 81-07, 1981.8.24), 경인지역 40개 석유대리점들의 거래상대방제한등 공동행위에 대한 시정명령(공정거래위원회 의결 제89-17, 1989.3.29), 19982000년간 군납유류 구매입찰 참가 5개 정유사들의 부당한 공동행위에 대한 시정명령 등(의결 제2000-158, 2000.10.17), 정유 5개사 및 한국주유소협회 부산광역시지회의 부당한 공동행위 등에 대한 시정명령 등(의결 제2001-106, 2001.7.24), 4개 정유사의 부당한 공동행위에 대한 시정명령 등(의결 제2007-232, 2007.4.11), 4개 정유사 등의 구속조건부 거래행위에 대한 시정명령 등(의결 제2009-050, 2009.2.3), 5개 석유제품 제조판매사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에 대한 과징금 부과 등(의결 제2011-161, 2011.9.16.)을 들 수 있다.

. 석유산업의 자유화 추진과 석유사업법 제2차 개정

1994.12월에 석유산업의 전면적 자유화 추진계획을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석유제품 가격의 전면적 자유화, 원유 및 석유제품 수출입의 자유화, 석유정제업 및 판매업 허가제의 등록제 전환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매일경제 1994.12.14). 뒤이어 1995.9월에는 경제행정규제완화 실무위원회에서 석유산업 자유화 방안을 의결하였는데 석유류 가격 및 수출입을 자유화하고 석유가격 자유화이후 1-2년뒤에 정제업과 주유소업을 완전 개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95.12.29. 석유사업법전면개정이 이루어졌다(시행시기는 97.1.1). 이는 석유산업의 경쟁을 촉진하고 대외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석유산업 자율화의 제도를 마련한다는 취지아래 외국인투자제한 폐지(시행시기는 ’98.10.1), 허가제인 석유정제업의 등록제 전환, 정제시설 신증설허가제의 신고제 전환, 석유수출입업자 매년 신고제의 등록제 전환, 석유수출입 허가제 폐지, 석유판매업 허가제의 등록제 전환, 비축의무자의 비축의무를 대행하는 대행업 신설, 정제업자, 수출입업자가 석유품질규격을 공시토록 하는 내용들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 참고자료 -

 

동력자원부. 1988. 동력자원행정 10년사.

한국석유유통협회. 2006. 석유유통 50년사.

한국석유공사. 2005. 한국석유공사 25년사.

한국석유개발공사. 1995. 석유사업기금백서.

한국석유품질검사소. 1994. 석유품질관리 10년사.

한국경제 60년사 편찬위원회. 2010. 한국경제 60년사 .

1974.3.21. 정부는 독점화되어 있는 석유류의 생산 및 유통체계를 재조정, 석유생산과 유통부문을 분리시키기 위해 석유류 판매전담회사인 한국석유산업회사의 설립을 검토하였다. 즉 정유회사는 생산만을 전담하도록 하고 판매는 한국석유산업회사에서 맡아 하도록 하여 독점체계를 없애고 정부의 통제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유회사의 생산제품을 매입비축하며 산유국이 국제입찰에 회부하고 있는 직판원유의 매입도 담당하게 할 계획이었다(매일경제 1974.3.21). 뒤이어 1974.6.1.에는 국제적인 에너지사정의 불안과 석유고가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장기에너지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는데 이 대책에는 정부의 석유류에 대한 조절기능을 강화하고 유통구조의 개선을 꾀하기 위해 한국석유개발공사의 설립을 검토하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경향신문 1974.6.1). 그러나, 비축시설의 건설 및 비축에 소요되는 재원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한국석유공사 p.125). 그 후 1977.12.16. 동력자원부가 신설되면서 이 계획이 다시 추진되었는데 석유비축 및 판매, 7광구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업무의 담당을 목적으로 설립을 검토하여(매일경제 1978.1.23), 1978.12.5. 한국석유개발공사법공포 및 1979.3.3. 설립등기를 거쳐 한국석유개발공사가 설립되었다. 한국석유개발공사법에서 정한 한국석유개발공사의 업무는 국내외 석유자원의 탐사 및 개발, 원유천연가스(액화한 것을 포함한다) 및 석유제품의 수출입비축수송 및 판매, ③『석유사업법에 의한 석유사업기금의 관리 등으로 하였으며, 1999.1.1. 한국석유공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