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황금물결의 시작 화왕산 억새 평원(가제)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6만평 대지의 억새군락지

길지혜 (여행 칼럼니스트)

가을이다. 뜨거운 여름을 견딘 녹음은 마침내 더위를 꿀떡 삼키고 발갛게 변했다. 알록달록한 등산객의 옷차림도 감출 수 있는 진명한 붉은 산이다. 산골짜기마다 흐르는 계곡에는 단풍잎이 물길 따라 유랑한다. 그렇게라도 낙하의 아쉬움을 달래는 것이다. 단 하루만 더, 추운 겨울이 하루만 더디게 오라고, 단풍에 마음 실어 보낸다. ! 만추의 눈부신 햇살이여. 문턱을 들락거리는 찬바람을 돌아 세우고 창녕 화왕산으로 10월의 가을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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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은 창녕을 대표하는 산이다. 봄엔 진달래, 여름이면 억새초원, 가을에는 황금색 억새물결, 겨울에는 설경이 장관을 이루는 경남의 명산이다. 어느 계절도 잊힐 수 없는 산이다. 그리고 이 가을의 절정에서 춤추는 화왕산 정상의 억새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경남의 중북부 산악지대에 있으면서 낙동강과 밀양강이 에워싸고 있는 진산,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에 자리해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 창녕여자중학교와 도성암을 지나 한걸음 한걸음 정상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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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새벽등산객의 인기척에 바람도 잠이 깬 모양이다. 그렇게 바람은 일어나 능선을 타고 화왕산 억새군락지로 찾아들었다. 억새들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맞잡고 가벼운 탱고를 춘다. 기꺼이 둘은 하나가 되었다. 바람이 화왕산을 베개 삼아 기대면, 억새는 반도네온의 주름상자 움직이듯 따라 움직인다. 하나, , , . 모여든 6만평(24)의 억새 무리가 군무를 추고 있다. 마침내 동이 트고 솟아오른 붉은 해는 정상의 억새를 물들인다. 하나하나 볼 땐 깡말라 갈색을 띈 모습이 별 볼품이 없지만 수만 평을 뒤덮어 만들어진 은빛 억새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억새 군락지 한가운데에서 맞는 아침. 6만평 억새밭에 올라서면 얼어붙은 오감이 살아난다. 수십만 억새무리의 군무, 바람이 긋고 지난 자리에서 나는 풀냄새, 사락사락 슬피우는 으악새소리. 거칠면서 부드러운 손끝의 감촉이 그것이다. 오감을 깨워 750m 정상부근의 대평원에 억새밭을 한 바퀴 도는데 만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깊은 숨 한번 들이쉬며 정상 위 평평한 바위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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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가을을 타는 나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진홍빛 진달래에도, 시원한 나무그늘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다가 가을이 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세월이 쏜살같아서일까. 아마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두 부자지간에 억새는 특별한 그리움이 서려있다. 조선시대 아홉 임금이 잠들어 있는 동구릉. 그 가운데 태조의 건원릉의 봉분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잔디 대신 억새가 자라고 있는 것. 한양으로 도읍을 정했던 태조는 고려의 왕릉 대부분이 산악지대에 있어 자주 찾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자신은 한양에 몸을 뉘기로 정했다. 태조가 죽자 그의 아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의 길지를 물색하다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낙점했다. 그러나 태종은 봉분에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심었다.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은 것이다. 왜 하필 억새풀이었을까?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는 풀일진대, 바람에 날아가는 억새의 씨앗처럼 태조의 기운을 세상에 퍼드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억새는 이성계에게 고향의 숨결이자 이들 이방원에게는 아버지를 지켜줄 고향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땅과 하늘 그리고 바람을 잇는 연결고리 같은 것 말이다.

흔히 억새와 갈대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억새는 주로 산에서 자라며 속이 차있는 반면 갈대는 강가나 습지에서 서식하며 속이 비어있다. 갈대는 3m 가량으로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크고 서로 엉겨 핀다. 하지만 억새꽃은 은발신사 머리처럼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줄기가 여리어 모시바람에도 가늘게 떤다.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억새꽃은 해가 뜨고 질 때, 빗긴 햇살에 보는 게 일품이다. 한순간 은빛너울이 붉은 물결로 바뀌어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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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전국의 억새 군락지가 꼭 가봐야 할 가을 여행지로 손꼽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신불산의 신불평원, 간월산, 천관산, 명성산, 무등산 등 가을이면 황금빛 억새 축제가 열리고, 수 만평의 일대에 제 각각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나 여기 화왕산이 조금 더 각별한 이유가 있다. 모든 걸 잃고도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담은 듯해서다.

이곳 화왕산에서 1995년부터 열렸던 억새 태우기 축제는 4년 전 대규모 화재사고로 폐지가 됐다. 200929, 대보름맞이 화왕산 억새 태우기 축제를 하던 때였다. 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바싹 마른 억새를 화마가 집어 삼키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6명이 사망했고 60여명이 부상당한 대형 참사였다. 축제를 보기 위해 모인 3만 명가량의 인파들이 달려드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 난리가 났었다. 그렇게 화왕산은 순식간에 시커먼 벌거숭이산이 되었고, 억새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었다. 하지만 생명력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화마도 잡아 삼키지 못한, 억새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다시 화왕산 정상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렇게 억새군락지는 슬픔은 있었지만 다시 일어설 희망이 있는, 우리네 삶과 닮아 있어 애착이 더욱 간다.

가을 억새를 보기 좋은 코스는 창녕여자중학교를 거쳐 자하곡 매표소, 도성암을 지나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그 길로 하산하는 것이 좋다. 넉넉하게 잡아도 4시간 안팎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산 정상은 밋밋한 분지로 되어 있다. 관룡산과 영취산이 지척에 있으며 낙동강을 끼고 있는 평야와 영남알프스의 너울춤 추며 우리를 기다린다. 화왕산 곳곳에 <허준>, <왕초>, <대장금>, <상도> 등의 촬영지가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600m 지대에는 화왕산성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성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분전지로 알려져 있다.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남문터로 내려가는 길 잡초더미 사이에 분화구이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다. 또한 산 정상의 서쪽 아래에는 조선 선조 이후에 축성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마산성이 있다. 산의 서쪽 사면 말흘리에서 진흥왕의 척경비가 발견되었다. 남쪽 사면에는 옥천사가 있다. 화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창녕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 2401,012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166266점을 전시하고 있다.

화왕산에서 내려와 보리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이곳 창녕까지 와서 우포늪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로 14천만년의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생태계의 보고이다. 무려 1,5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1997726일 생태계보전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됐으며 이듬해 32일 람사협약 보존습지로 지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으뜸 명소 8으로 선정되기도 한 곳이다.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가진 창녕은 주말을 맞아 12일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겨울의 문턱에 올라선 이 가을.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창녕으로 향해보자. 어느덧 몸 안으로 햇살과 황금빛 춤추는 억새와 보리밥 한 그릇이 당신의 지친 일상을 위로할지도 모른다.

등산코스

자하곡매표소 1코스(3km):자하산매표소- 배바우 헬기장 - 서문- 화왕산 정상

소요시간 약 4시간으로 화왕산을 오르는 코스 중 가장 난코스

 

자하곡매표소 2코스(2.6km): 자ᄒᆞᆫ매표소 - 탱크바위 - 환장고개 - 서문 - 화왕산정상

소요시간 약 3시간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최단거리 주등산로

 

옥천매표소~청룡암~관룡산~화왕산 코스(5km) : 매표소 - 관룡사 - 청룡암 - 구룡산삼거리 - 관룡산(754m) - 옥천삼거리 - 허준세트장 - 동문 - 화왕산

소요시간 약 5시간으로 약간의 암벽등반이 있어 많이 가파르지만, 병풍바위 절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코스.

찾아가는 길

서울-경부고속국도-금호분기점-구마고속국도-창녕IC-옥천리

 

창녕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cng.go.kr/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