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일본 동경 만에는 사람들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검은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배 4척이 나타났다. 미국 페리 선장이 이끌던 이 배는 '흑선내항'이라 불리는 일본 근대사의 일대기적 사건이었고 이어 명치유신이 시작된다. 이토 히로부미나 시바 료타로의 인물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며 동아시아 역사는 아주 급작스러운 속도로 전근대적 사회에서 많은 것을 바꾸어야 했던,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으되 각 국가는 저마다 그 근대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달랐으니 그것이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여전히 그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하며, 의의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근대에 대한 증거는 여기저기 남아있는 건축물을 통해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서울 역시 탈근대를 지나 초현대사회에 진입하고 있지만, 20세기 초 건축된 근대양식 건축물들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김영삼 정부 들어 일제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던 것은 소위 90년대까지 남아있던 근대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대표적인 행동이었다. 그것은 지나간 역사에의 부정이었고, 여전히 도심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사에 대한 반발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이를 조명하면 단순히 이러한 근대 문물 -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 에 분노를 느끼는 것만이 옳은 것인가 의문을 품게 된다. 여러모로 이러한 근대 건축의 도입은 당시 한국 사회로 하여금, 최소한 건축물의 비약적인 변화와 발전을 야기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여전히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존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 시대에의 적극적인 화해를 시도하는 행위다. 지나가며 그저 멋있는 붉은 벽돌 건물이라고 여겼던 건물이 실상 건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나아가 인문학적으로 들여다 볼 가치는 충분히 남아있다. 이에 앞으로 3회에 걸쳐 서울 도심 속에 남아있는 근대 건축을 직접 답사하고 개략적인 설명을 나누기로 한다. 그 첫번째 발걸음으로 여전히 근대의 때를 벗지 못한 중구 정동길을 걷는다. 배재학당동관 (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시청역 2호선 10번출구로 나와 서소문사거리 방향으로 걷다보면 오른편에 바로 배재학당동관이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배재학당동관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며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2001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된 건물로 한국 근대 교육적 의미가 크며 한국 근대 건축으로서 그 형식이 우수하다. 건물의 구조와 창문, 외장 및 벽돌 구조가 뛰어나며 정면의 현관과 양쪽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이 대체로 남아 있고 건물의 형태가 우수하여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 된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배재고등학교 동관으로 불렸다. 2008년 7월 24일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체험교실, 세마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을 재현하였다. 정동교회 배재학당동관과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 사거리로 나오면 가운데에 정동교회가 보인다. 정동교회는 1895년 9월에 착공,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를 사용했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구세군 중앙회관 정동교회를 오른편으로 나와 덕수궁을 오른편에 두고 언덕을 올라가면 구세군 중앙회관 건물이 보인다. 구세군은 영국의 감리회 목사가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1829∼1912)가 창설한 그리스도교 교파다. 한국에서는 1908년부터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구세군의 사관 양성과 자선, 사회사업의 본거지가 된 이 건물은 벽돌조의 지상 2층으로 1926년에 완공되었다. 좌우대칭으로 된 안정된 외관과 현관 앞에 배치된 거대한 기둥, 구세군 사관학교가 명시되어 있는 정면 중앙 상부의 박공, 목조의 짜임 등 건물의 세밀한 부분이 조화를 이루어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세부적으로 개조된 부분이 있고 건물 뒷면은 증축되었지만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구세군 활동과 관련한 그리스도교 유적으로 근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성공회 서울대성당 구세군 중앙회관 건물에서 동화면세점 방향으로 나와 다시 헤럴드미디어 방향 골목으로 들어가면 맞은편에 성공회 서울대성당이 보인다. 사실 정동길 근대건축을 탐방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이 서울대성당이었다. 1922년 영국인 A.딕슨의 설계에 따라 영국성공회의 지원과 국내 신자들의 헌금으로 M.트롤로프 주교의 지도·감독 아래 공사가 착공되어, 4,449㎡의 대지 위에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쌓은 로마네스크양식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 건축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원래의 '큰 십자가' 형의 설계대로 못 짓고,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뗀 채 '작은 일자형'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미완의 건물'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 우연히 영국 렉싱턴 지역의 박물관에서 원래의 설계도가 발견됨으로써, 1994년 8월 증축허가를 받고 원 설계도에 따라 1996년 5월에 축성식을 가졌다. 근대건축물은 현대양식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하학적인 현상과는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엄격하면서도 장엄한 고딕 양식, 화려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사용된 한국의 근대건축물은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없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여전히 이방인의 발걸음이 잦은 정동길은 그래서 여전히 근대건축이 여기저기 발견되고 있다. 다음은 명동과 남대문 일대의 근대건축을 탐방할 계획이다. (건축물 설명 : 두산백과사전)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웟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