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중독증에 걸린 대한민국
매일경제 노원명기자
요사이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전화에 어김없이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한국전력에서 출입기자들에게 뿌리는 오늘의 전력예보 메시지다. 보통 새벽 4시께 뿌려지는 메시지는 이런 식이다. "최대 전력수요 6800만kW. 최저 예비력 425만 kW, 전력수급경보 `준비' 예상..." 또 오전, 오후 일과시간 중에는 이런 메시지가 날아든다. "14:31분로 순시예비력이 450만kW 미만으로 떨어져 전력수급경보 준비단계를 발령합니다." 오후 5시쯤 다시 문자가 온다. "17:15분 부로 수급경보 준비발령을 해제합니다."
요컨대 하루 일과를 전력으로 시작해 전력으로 끝내는 나날의 연속이다. 따져보니 6월 3일부터~21일 사이 19일 동안 전력수급경보가 발령된 것이 11일이나 됐다. 공휴일 5일을 빼고나면 평일에는 거의 매일 예비전력이 450만kW 밑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이렇게 버거울 수가 없다. 사방에선 `아껴라. 그래야 산다'는 독려가 넘쳐나고 기업들은 반바지차림 허용, 전력피크기에 맞춰 휴가일정 조정, 정기보수 일자 조정 등 절전 대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낸다. `애국'을 넘어 `우국'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것이 세계 15위권 경제대국, 산업수출대국 대한민국이 여름을 나는 풍경이다. 국가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중에서 예비전력이 매일 위험수위를 오르내리는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원전비리 사태가 정도를 좀 심화시키긴 했어도, 그래서 올해 유독 국민적 공분과 관심이 집중되긴 했지만 실은 매년 여름과 겨울이면 늘 그래왔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다. 왜 유독 이 나라에서만 이런 `생쇼'가 철마다 펼쳐지는가. 이건 솔직히 창피스런 일이다.
우리는 이미 원인을 알고 있다. 대한민국이 `전력중독증'에 걸린 나라이고, 전기를 기름보다 우습게 펑펑 쓰는 유일한 나라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전기는 비싼 고급 에너지다. 석탄, 액화천연가스(LNG), 원자력 등 1차 에너지를 연소 또는 반응시켜 발전기를 가동할 때 생기는 2차 에너지다. 화력발전소의 평균 발전 효율(30~40%)과 송배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까지 감안하면 전기에너지는 1차 에너지보다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이런 전기를 우리처럼 흥청망청 쓰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국토 면적당 에너지와 전기 생산, 소비량 등을 측정하는 `에너지 밀도'에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나라 중 가장 높다. 우리나라의 가용 면적당 전기소비량은 1만1244TOE/㎢으로 일본의 1.5배, 영국의 6.6배나 된다.
2002~2010년 OECD 회원국의 전력소비 증가율은 9% 수준이지만 우리나라는 56%에 달했다. 전 세계적인 흐름과 역행하면서 우리만 `전기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전기 남용에 따르는 환경문제도 우려할 수준이다. 우리나라 발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연탄은 이산화탄소 배출이 매우 높은 연료다. 심야 전기난방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08년 기준 약 400만톤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된바 있다.
한국전력이 전기요금 체계는 100원에 팔아 12원을 손해보는 구조다. 팔면 팔수록 적자가 쌓이는 이상한 구조다. 에너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요금체계를 즐기며 전기를 펑펑 쓰는 소비자나 손해를 보고 장사하는 공급자나 모두 이상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전력수급 문제 해결의 첫째 단추는 전력소비를 줄이는데서 끼워져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 2차에너지(전기)가 1차 에너지보다는 비싸져야 한다." 에너지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OECD국가의 가정용 전기요금 평균가격은 MWh당 169.9달러로 나타난다. 한국은 93.1달러로 전체 평균의 54.8%에 불과했다. 일본(276.8달러)에 비해선 3분의1 수준, 독일(338.8달러)에 비해선 거의 4분의1 수준이다. OECD국가중 한국보다 낮은 요금수준을 보인 나라는 멕시코(90.2달러)가 유일했다.
전기요금이 싸다 보니 우리나라 가정집에서 기름난방을 하는 집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심지어 농촌의 비닐하우스에서도 기름 난로 대신 천장과 바닥에 열선을 깔아 전기난방을 한다.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전기로 제강 등 전력다소비 산업도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현대제철 전기로가 소모하는 연간 전력량은 울산시 전체 소비량과 맞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조업 강국인 우리나라가 갑자기 에너지 소비를 줄일수는 없다. 일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대안은 전력에 편중된 에너지원을 다양화하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최근 겨울철 전력난은 여름보다 훨씬 심각한 양상을 띄고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난방수요를 등유가 일정정도 흡수해 주기만 해도 겨울철 전력수급에 큰 숨통이 트일 것"이라 제안한다. 아파트에서 등유나 LPG난방을 수용하기는 어렵지만 비닐하우스나 공장, 일반 단독주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등유가 전기보다 비싼 에너지가격 구조다.
우리나라에서 등유는 TOE당 가격이 1696달러로 전기(1030.7)보다 1.6배 가량 비싸다. 1차에너지에 `발전'이라는 가공과정이 더해져 나오는 2차 상품이 전기임을 감안하면 비상식적인 가격구조다. OECD국가중에 2차 에너지가 1차 에너지보다 더 싼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편리하면서 심지어 더 싸기 까지한 전기를 두고 등유를 쓰라고 강요할수는 없는 일이다.
답은 분명하다. 1~2차 에너지 가격역전이다. 방법은 △전기요금 대폭 인상 △전기요금 소폭 인상과 유류가격 소폭 인하 두가지로 압축된다. 그러나 소비자 가격저항을 감안할때 전기요금 대폭 인상은 쉽지 않다. 결국 유류가격 인하가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른다.
현재 국내 기름값의 약 50%는 유류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이 차지하고 있다. 5월1일 현재 휘발유에는 리터당 975원, 경유는 729원, 등유는 280원의 세금이 매겨진다. 김창섭 가천대 교수는 유류세에 적용되는 최대 탄력세율인 30% 인하를 주장한다. 이 경우 유류세 인하효과는 총 6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파생되는 세수 부족분은 사실상 면세인 발전용 유연탄과 원자력에 새로 세금을 매김으로써 상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현재 유연탄에 발전용 LNG와 동일 기준으로 과세할 경우 약 5조원의 세수 징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연탄 등에 과세하면 발전 비용이 증가해 1차 에너지 대비 전기요금의 상대가격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된다.
유류세 인하는 가짜 석유시장 근절이라는 부가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짜 석유 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가짜 경유의 경우 경유와 등유를 섞어 만들어진다. 이렇게 얻어지는 사업자 마진은 200~300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유류세를 100원만 떨어뜨려도 가짜 석유 인센티브가 확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짜 석유시장이 줄어들면 탈루세액이 감소하고 택시 및 화물차에 지급되는 유가보조금을 인하할 여력이 생겨난다. 유류세 인하가 세수 확보에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차제에 에너지세제의 거버넌스 자체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금 에너지세제에서 우선 순위는 물가관리와 세수확보에 두어지고 있다. 에너지원간의 균형, 즉 에너지믹스에 대한 고민이 없다. 에너지믹스가 세제에 반영되려면 에너지 당국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 김창섭 교수는 "물가 당국이 모든 에너지원에 대해 통합적으로 물가인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세수당국이 에너지 전체에서 필요한 세수규모를 결정하면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에너지당국이 에너지원별 세부 세금징수액을 결정하는 방식이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