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좋은 기름값 정책





서울경제신문 산업부 김현상기자


“정부에서 만든 알뜰주유소가 가짜 석유를 파는 마당에 누굴 믿을 수 있겠어요.”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서 만난 운전자는 알뜰주유소에 대해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지방의 한 알뜰주유소가 가짜 석유를 판매하다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치솟는 기름값을 잡겠다며 지난해 말 정부가 야심차게 도입한 알뜰주유소에 대한 신뢰가 한 순간에 땅바닥에 떨어진 셈이다.

지난 4월말 석유관리원에 적발된 순천의 한 알뜰주유소는 같은 시내에 운영 중인 다른 알뜰주유소 중에서도 가장 기름값이 싼 곳이었다. 하지만 저렴한 기름값의 비밀이 난방용 등유와 시너 등을 섞어 만든 가짜 경유였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소비자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더욱이 가짜 석유를 판 곳이 다름아닌 정부가 만든 알뜰주유소였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체면을 구긴 지식경제부는 지난 5월 부랴부랴 강화된 가짜 석유 근절대책을 내놓았다. 가짜 석유를 판매하다 적발될 경우 즉시 주유소 등록을 취소하고, 같은 장소에서 2년간 영업을 못하게 하는 등 처벌 강도가 이전보다 세졌다. 과징금 역시 두 배씩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발표에 대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뒷북 대책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알뜰주유소의 가짜 석유 판매는 사실 정부가 방조한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경부는 지난 2월 알뜰주유소 가입요건에 포함돼 있던 ‘품질보증 프로그램(매월 1회 불시검사를 통해 품질인증마크를 받는 제도) 가입 의무화 조건’을 없애고 개별 주유소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보다 많은 주유소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정부의 안일한 정책은 결국 ‘공신력 추락’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정부는 지난 4월 추가로 내놓은 기름값 대책에서 알뜰주유소에 각종 세금감면과 시설비용 지원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올해 알뜰주유소 확대계획을 당초 700곳에서 1,000개로 늘려 잡았다. 지경부는 이번 인센티브를 따져봤을 때 연간 390억원 정도의 세제 혜택이 주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알뜰주유소는 처음 도입 단계에서부터 실효성을 두고 논란이 많았던 정책이다. 알뜰주유소가 시장의 우려를 딛고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숫자 늘리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지속적인 사후 검증 프로그램과 같은 세심한 대책들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매년 390억원의 혈세를 쏟아 붓는 또 하나의 전시 행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고유가 시대를 맞아 정부의 에너지 정책도 가격 안정화에서 소비 합리화로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꺾일 줄 모르는 유가 고공행진에도 올 들어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매월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공급가격 안정에 초점을 맞춰온 정부의 에너지 대책이 사실상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가 공급적인 측면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에너지 소비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4월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지난해 4월(521만8,000배럴)보다 5.57% 늘어난 550만9,000배럴로 역대 4월 휘발유 소비량 가운데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로써 휘발유 월 단위 소비량은 지난해 11월부터 무려 6개월째 전년 대비 증가세를 이어갔다.

지난해 말부터 불거진 이란발 중동정세 불안으로 기름 값은 유례없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국내 휘발유 소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11월 586만7,000배럴로 전년 동기 대비 0.82% 증가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12월에도 4.07% 늘어난 621만2,000배럴을 기록했다.

이 같은 소비 증가세는 올해도 계속되며 1월(582만3,000배럴)과 2월(567만5,000배럴) 각각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59%와 4.35%씩 증가한 데 이어 3월에도 지난해보다 4.11% 늘어난 568만6,000배럴을 기록했다. 올 들어 휘발유 소비가 계속 늘면서 1~4월 누적 소비량 역시 전년 동기 대비 5.4% 증가한 2,269만3,000배럴을 기록하며 같은 기간 소비량으로는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반면 국내 휘발유 판매가격은 올해 들어 꾸준히 오르고 있다. 올 1월 리터당 1,955원08전이던 휘발유 평균가격은 2월 1,986원54전에 이어 3월 2,029원95전, 4월 2,058원68전까지 치솟은 상태다. 결국 휘발유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상황에서도 소비는 전혀 줄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휘발유 가격과 소비가 동반 상승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이 고유가에 둔감해진 결과라고 분석한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박사는 "과거 외환위기 당시만 해도 유가가 단기간에 급등해 휘발유 소비가 감소했지만 최근 100일 넘게 지속된 고유가로 소비자들이 가격에 둔감해진 탓에 소비가 줄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기름을 많이 먹는 중대형 자동차의 판매가 늘어난데다 정부의 가짜 석유 단속 강화로 정품 휘발유 소비가 증가한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고유가에도 휘발유 소비가 줄지 않는 기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정책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정유사들을 옥죄어 기름 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그릇된 에너지 정책 때문에 정작 소비자들은 에너지 낭비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국민들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