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미술관 기행

 
SK에너지 황정운 사원

 


내 사랑 백석
 

L선배의 책상에는 조그맣게 인쇄된 낯선 남자의 흑백사진이 붙여져있다.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짙은 눈썹, 게다가 한껏 하늘높이 치솟은 머리가 한 눈에도 범상치 않다. 일제시대의 교복인 듯한 옷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백석(白石). 이광수, 김소월과 더불어 평안북도 정주가 낳은 세 명의 천재 문학인 중 한 명인 백석의 사진을 L선배는 꽤나 오랫동안 사무실 책상에 붙여놓고 있었다. L선배 책상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 윤동주나 안중근의 초상화는 이미 널리 유명하지만 이렇게 촌스러우면서도 뭔가 모던뽀이의 냄새가 나는 얼굴은 도무지 익숙치 않았던 것이다. L선배는 백석의 사진으로도 모자랐는지 그 옆에 백석의 시 한 수를 작게 프린트하여 같이 붙여놨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라며 시작하는 이의 제목은 이름도 어려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이었는데, 가끔씩 L선배는 회사 일이 힘들 때마다 백석의 사진과 시를 바라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L선배는 그 뒤로도 나와 2년동안 함께 일을 했다.

어느 날 L선배가 내 등을 툭툭치길래 뒤를 돌아보니 환한 얼굴로 책 한 권을 나에게 내민다. 무언가 하고 봤더니 몇 년 전에 출간된 <백석 평전> 이었다. 회사 근처 청계천 어느 골목에 헌책방이 있는데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어 헌책방에 가서 이 <백석 평전>을 사온 것이다.  나도 그 즈음 L선배의 백석 사랑에 호기심이 생겨 그에 대해 이것저것 책도 찾아보고 시도 읽어보며 그를 알아가던 중이었다. 특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라는 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분명 읽었던 시였건만 그때는 밑줄 그으며 화자의 시선이 어떻고 함축적 의미가 어떻고를 외우느라 도무지 감흥이 없었는데 사회에 나오고 그의 시를 다시 읽으니 분명 느껴지는 바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L선배와 나는 서로가 백석을 더 좋아한다는 등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가끔 좋은 정보를 주고 받았다. 그러던 중 모두가 퇴근하고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늦은 밤, 자리를 정리하다가 L선배가 그 책을 책상 한 켠에 두고 간 것이 보여 슬쩍 꺼내들어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내용을 다 읽을 수 없어 앞에 소개 글 정도만 간략히 보는데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화가였던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와 같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 영감을 준 근원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백석 시인을 알게 되었고, 백석의 시에 매료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거장들인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도 마찬가지였다" 는 내용이었다. 나는 책을 내려놓으며 그 화가들의 이름 중 가장 마지막에 있던 <김환기> 라는 이름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또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교차했다. 앞서 열거된 이중섭, 박수근은 모두에게 익숙한 근대 미술의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물론 이중섭은 말할 것도 없고 박수근은 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강원도 쪽으로 워크숍을 가거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갈 때면 강원도 양구에 들러 박수근 미술관을 들러 이런저런 그림과 글귀를 감상하고 오기도 했지만, 예전에 한창 박수근 그림이 위작이냐 아니냐를 두고 여론이 시끄러울 때 수습기자로 그의 그림을 감정하는 현장에 가서 하루종일 기다리며 취재했기 때문이었다. 2008년 초 였던가, 종로 안국역 근처에 있는 한국미술품감정협회라는 곳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위작인지 아닌지 감정하는 날이 있었는데 다른 신문사 기자들 틈에 껴서 하루종일 좁은 골방에서 감정결과가 끝날 때까지 추위를 견디며, 점심시간이면 협회에서 시켜준 된장찌개를 먹으며 저녁 늦게까지 기다리다 사무실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뻗치다> 라는 단어는 취재를 위해 하루종일 현장에서 죽치고 기다린다는 뜻의 기자들의 은어인데, 나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아 오늘 오랫만에 뻗치네" 라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하루종일 추위에 떨었다. 결국 그날 박수근의 그림 감정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환기에 대해서는 퍽 낯설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어딘가 그의 작품을 여러번 보았다는 기억이 계속 환기되었다. 그 기억은 최근의 것도 아니었으며 더 과거로 거슬로 올라간 유년기의 것이었다. 김환기, 호는 수화이며 1913년 전라남도에서 태어났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뉴욕으로 건너가 1974년 그곳에서 생을 다했다. 1930년대 구인회의 멤버였던 박태준, 이상과 친했으며 조지훈, 정지용, 김용준, 김기창 등의 미술, 문학,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두루 교류가 있었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였으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남겼고, 그래서인지 그의 초기 중기 작품에는 유난히 한국적인 정서가 깃들여져 있다. 푸른색을 활용하였으며 늘 그의 그림에는 청색 보름달이 등장하고 .. 하는 정보의 나열들은 그 후 김환기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 기억을 더듬고자 공부하고 그림을 감상하며 알게 된 내용들에 불과했다. 수화의 그림 중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새> <매화>와 같은 작품을 말없이 계속 들여다보며 분명 어딘가에서 이 사람의 작품을,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분명 나의 유년기를 만들어왔던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분명 약하고 가는 실에 불과했지만 김환기와 나의 연은 무엇인지, 유년기 이후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났던걸까 나는 궁금했다. 그래서 <백석 평전>에서 백석의 시가 김환기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나도 백석에서부터 김환기를 더듬어가고 싶어졌다.

그랬다,  백석에서 출발해 김환기를 찾아가는 아주 가벼운 예술기행인 이 이야기는 그래서 성북동 길상사에서부터 시작한다. 결론부터 생각해보면 꽤나 실패한 기행이었다.

image

image

 

성북동에서 부암동까지

 
3월이 되었지만 아침바람이 여전히 서늘했다. 주말 서울시내가 붐빌까봐 아침 일찍 집에서 나섰는데 덕분에 성북동 길상사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법회를 준비하는 몇 신도를 제외하고는 경내가 조용했다. 입구를 지나 길상사 극락전 앞의 탁 트인 마당을 휘이 돌아본 뒤 오른편에 있는 <바람그늘>에서 성북동 아침을 내려다보고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절 내를 걷기 시작했다. 길상사는 원래 절이 아니었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이 있던 자리였다. 1987년까지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은 문득 법정스님의 책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당시 시가 1,000억원 이상이던 수천평에 달하는 대원각 터와 건물을 모두 시주하여 절을 건립한 것이 오늘날 길상사의 시작이다. 김영한, 그녀는 평북이 낳은 천재시인 백석의 잊을 수 없는 여인이다. 종로에서 태어난 서울배기 김영한은 집안 가세가 기울자 춤과 노래를 배우며 유명한 기생이 되었는데, 그녀 나이 스물에 당시 함흥에 영어교사로 와 있던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그 당시 시대상황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시 <사슴> 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백석은 기생 출신이었던 김영한과 어울리는 것에 끊임없는 집안 압력을 받았다. 고민하던 백석은 김영한에게 함께 조선을 벗어나 만주 신경(지금의 중국 장춘)으로 함께 가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김영한은 장춘으로 떠나기 전 날 함흥에서 서울로 혼자 도망치듯 내려오게 된다. 그때 김영한의 나이 스물 둘, 백석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그러나 백석 역시 김영한을 잊지 못하여 결국 함흥 영생교보 영어교사를 그만두고 곧 서울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청진동에 작은 집을 얻어 삼 년 간 함께 지내게된다. 그런 만남과 이별이 오죽 애틋했을까, 그 즈음에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을 남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1938년 作 

 
 
백석은 결국 김영한과 함께 장춘으로, 나타샤와 함께 마가리로 가지 못했다. 백석은 김영한과 함흥에서 처음 만나 그 후 서울에서 삼년간 동거했고 그 뒤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여 그 뒤 소식이 끊겼다. 김영한은 그 뒤 백석이 지어준 "김자야" 라는 이름으로 죽기 전 <내 사랑 백석> 회고록을 펴낸다. 그런 애닯음과 애틋함이 묻어있는 길상사의 아침은 조금씩 날이 개면서 포근해졌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처럼 화려하고 조용한 절이 있으나 경내를 한바퀴 휘이 도는데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중간중간 오솔길에 걸려 있는 맑고 향기로운 글귀를 읽으며, 이곳이 지금은 법정스님이 기거했던 곳으로 더 유명해져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을 다한 김영한, 아니 김자야는 이곳에서 잠깐 만나고 사라진 백석을 평생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극락전 앞에 조각된 저 관세음보살 상은 무얼 생각하고 바라보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굽어 내려본단 말인가, 그런 생각으로 길상사 경내를 오래도록 걸어다니며 인적이 끊긴 소리를 마주했다. 날이 여전히 추웠다.

좁은 성북동 길을 따라 30분정도 돌아내려갔다. 길상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심우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심우장, 좀 더 긴 이름은 만해한용운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일제시대 말 기거하고 이곳에서 죽었던 성북동의 작은 자택이다.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이 대학 신입생 때였으니 10년만에 다시 찾는 셈이었다. 문학과 불교사상에 해박했던 국문학과 최동호 교수님의 수업을 듣던 중에 심우장에 다녀와서 레포트를 제출하는 것이 무려 중간고사 점수의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학교 정문에서 버스를 타고 한성대입구역에 내려서 꼭 김광섭의 <<성북동비둘기>>가 날아다닐 것 같은 잿빛 성북동 속으로 열심히 걸어가보니 좁은 시멘트 골목 끝에 심우장이 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삼십여명이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갔으니 오죽 시끄러웠을까. 그래도 최 교수님 설명을 간간히 들으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너른 마당에 서니 역시 성북동이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마당에 나 혼자 서 있다. 그 누구도 없다. 주말 아침 열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심우장을 찾는 사람이 없음이 감사했고, 고요한 심우장을 나는 십년만에 다시 홀로 찾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 친필로 된 글귀와 그의 초상화 등을 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있다. 쉬었다 갈 요량으로 마루에 잠시 앉으니 지금껏 몰랐는데 심우장은 조용한게 아니라 꽤나 소란스러웠다. 나무 위의 까치가 악악 울어대는 소리, 소나무 위에 참새가 푸드덕 하는 소리, 윙윙 바람이 부는 소리, 그 바람에 창호지 문이 끼익 끼익 여닫히는 소리, 그 창호지 문의 쇠붙이가 덜커덕 덜커덕 부딛히는 소리, 자세를 고쳐앉을 때마다 마루가 삐그덕 삐그덕 울어대는 소리 ... 아무도 없는 심우장에는 그런 소리들로 가득했다. 어쩌면 바로 그게 아침 일찍 찾은 이유였다.

image

image


심우장은 상허 이태준 고택을 찾아가는 길에 잠시 들린 셈이었다. 심우장에서 나와 성북구립미술관으로 다시 걸어 내려와 그 옆에 있는 <수연산방>, 그러니까 작가 이태준의 저택을 기대 가득하며 들어갔다. 이태준은 1920년대 30년대에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문학동인회였다. 늘 아홉명을 유지했기 때문에 구인회라고 불렸는데, 이 모임에 소속된 이들을 지금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바다와 나비>>의 김기림, <<메밀꽃필무렵>>의 이효석,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원술랑>>의 유치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이자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인 박태원, <<오감도>>의 천재시인 이상, 시 <<향수>>의 정지용, 소설 <<봄봄>>의 김유정... 저마다 가입하고 나간 시점은 조금씩 달라도 구인회는 늘 아홉명을 유지했고, 이태준도 그런 구인회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이태준은 그 고택을 <수연산방> 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이곳에서 문학작품을 집필하였다. 그런 수연산방이 지금은 유명한 찻집이 되어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데, 내가 찾았던 아침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주인 내외가 수연산방 곳곳을 먼지털이로 총총히 털다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사람이 찾을 시간이 아니라는지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주인 내외에게 잠시 둘러보러 왔다는 말만 남기고 수연산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이내 눈치가 보여 금새 나와야만 했다. 그럼에도 사람이 없는 수연산방에서는 바람에 기왓장이 덜그락거리는 소리, 바람따라 처마 밑 풍경이 뎅뎅 울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건 늘 이곳을 찾을 때마다 소음으로 가득했던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이제 성북동에서의 볼 일은 모두 끝났다.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김영한이 시주한 길상사를 시작으로, 성북동의 심우장을 둘러보고 근처의 수연산방에 가니 이태준 선생이 활동했던 구인회의 한 사람이었던 작가 이상에게까지 연결된다. 이제 부암동 환기미술관으로 가야 할 때였다. 몇 시간을 걷다 쉬다 했더니 발이 몹시 아팠다.

 

환기미술관에서

 
김환기는 1944년 두 살 연상인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향안과 결혼한다. 김향안, 그녀의 본명은 변동림. 당대의 지식인인 변동욱의 동생이며, 이상이 폐병으로 죽기 몇 달 전 이상과 결혼하여 수개월동안 그의 아내가 되었다. 1937년 이상이 죽고 난 뒤 또 다시 수 년이 지난 뒤 변동림, 아니 김향안은 김환기와 결혼한다. 김환기도, 김향안도 모두 재혼이었다. 이는 꼭 비엔나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었던 알마 마리아 쉰들러(Alma Maris Schindler)의 삶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요즘 들어 한국에서 더욱 유명해진 구스타프 말러와 처음 결혼식을 올린 알마는, 말러가 죽고나자 당대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을 하고, 수 년 뒤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이번에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간다. 작가 고은은 이러한 사실을 <이상 평전>에서 언급하면서도, 그럼에도 이러한 점이 김환기의 화가로서 위대한 점과는 별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상과 김환기가 변동림이라는 여인을 두고 연결되어있음은 미처 몰랐던 점이었다. 김환기는 후에 그의 회고록에서 아내 김향안을 자신의 평생의 동지이자 고마운 존재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말한다.

아침 바삐 움직였음에도 부암동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다. <클럽 에스프레소>를 오른편으로 두고 좁은 골목길로 내려가니 금새 환기미술관이 보인다. 이곳을 찾은 것이 이번이 세번째였고, 먼저의 두 번 모두 여름 한중간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환기미술관 근처 주택에는 바람개비가 팔랑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A와 나는 환기미술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조용히 돌아다니며 중간중간의 조형물과 김환기 특유의 파란색을 암시하는 형상들도 감상하곤 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의 환기미술관이 화가 김환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예술의 훌륭함을 계속 환기하는 것인가.. 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나는 A에게 자랑스럽게 하곤 했는데 이제서야 나는 김환기를 알기 위해 부암동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꼭 어렸을 적 아무것도 모른채 같은 반 친구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고는 뒤늦게서야 그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행동인지 깨닫고 다시 그 친구에게 사과하기 위해 단박에 뛰어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때마침 찾아간 환기미술관은 다음 전시 준비로 카페테리아를 제외하고는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카페를 지키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미술관에서 나와 다시 자하문고개로 돌아갔다. 아쉬운 마음에 <클럽 에스프레소>에 들러 콜롬비아 원두로 만든 커피 한 잔을 시킨 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고간 김환기 그림 도록을 꺼내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백석의 이름에서 김환기를 발견했고 그를 찾아 성북동에서 부암동으로 건너왔다. 동시에 분명 그의 작품이 어디선가 낯익다는 유년의 기억을 꺼내집었으나 도통 선명하게 그릴 수 없었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푸른 보름달이 가득한 그의 작품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엇? 하는 순간이 딱 스쳐갔다.

 

그건 바로 소리였다. 길상사에서 여기까지 오며 나는 계속 소리를 들었다. 길상사에서 아침법회를 준비하며 스님들이 오고가며 나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목례하던 말없는 소리. 아무도 없는 심우장에서 나무 위의 까치가 악악 울어대는 소리, 소나무 위에 참새가 푸드덕 하는 소리, 윙윙 바람이 부는 소리, 그 바람에 창호지 문이 끼익 끼익 여닫히는 소리, 그 창호지 문의 쇠붙이가 덜커덕 덜커덕 부딛히는 소리, 자세를 고쳐앉을 때마다 마루가 삐그덕 삐그덕 울어대는 소리. 도망치듯 쫓겨난 수연산방 이태준 고택에서 들리던 풍경소리, 기왓장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알았다는 듯이 한달음에 달려간 환기미술관의 소리들..

분명 나는 아주 어릴적 맹꽁이가 맹꽁맹꽁하며 울어대는 밤 깊은 소리를 들었다. 미술을 좋아하셨던 부모님은 우리가족이 수원에 살았을 때 주말이면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이나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종종 들렸다. 지금은 에버랜드로 바뀐 자연농원에 갈때면 꼭 오후 일찍 호암미술관에 들렸고, 그곳에는 이인성의 <<정물>>, 이상범의 <<추경산수>> 와 같은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유유히 전시되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이 백남준의 <<다다익선>> 임을 알았지만, 그 때는 그냥 엄청나게 많은 TV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던 백남준의 작품, 유리와 빛과 색을 이용해 전시했던 여러가지 현대미술작품들을 보며 와 이게뭐야 라며 빨리 집에 가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집에 올 때 즈음이면 늘 밤늦은 시간이었는지 어둑어둑 한 기억이었다. 가로등이 많지 않은 어두운 길로 미술관에서 빠져나올 때면 근처 논두렁인지 숲속인지에서 꼭 맹꽁이인지 두꺼비인지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 소리였다.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부모님 손을 잡고 수없이 찾았던 미술관들 그 가운데에 분명 김환기의 작품이 있었다. 분명 김환기의 푸른 색이 거기에 걸려있었다. 그것이 지금에 유명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인지 <<영원의 노래>> 인지 지금은 도저히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어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계속 보았던, 만졌던, 들었던 그림과 소리 속에 김환기는 존재했고, 그 기억이 지금에서야 부끄럽다는 듯 김환기를 찾아 환기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미술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모르며, 심장을 관통하는 강한 인상을 남겨준 것도 분명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그림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고, 시간이 이십년이나 흘러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그와 다시 만났다.

오늘 당장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과 전시를 감상하는 것은 뒷날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나는 우연히 발견한 L선배의 <백석 평전>에서 김환기의 이름을 읽었고, 성북동 길상사에서 시작해서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오며 심우장과 수연산방에 잠시 머물렀고, 이태준과 이상, 그리고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에게서 다시 김환기로 이르는 길을 따라 걸어왔다. 유년기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근대미술거장들의 그림 속에 보였던 푸른 색의 김환기와 나는 아주 가는 실로 이렇게 연결되어 내가 성인이 된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타인의 눈에 이 실은 아주 보잘 것 없고 의미없는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누구에게라도, 분명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김환기와, 그 외의 모든 예술가들과 연결된 저마다의 실이 있을 것이고 오늘 당장 모든걸 알지 않더라도 또다시 시간이 흘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면 될 일이다. 종로 사간동에 위치한 갤러리현대에서는 얼마 전인 2월 26일까지 김환기 전시회가 열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다음 주말인 3월 18일까지 <아름다운 만남> 주제로 지금껏 미술관에 기증한 이들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그 중에는 김환기의 작품도 두 세 점 포함된다. 3월 말이 되면 환기미술관에서도 새로운 전시가 시작될 것이다. 수화 김환기의 그림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은 앞으로도 많을 테다. 아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