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3천년의 역사를 마주하다

 

류인권 언론홍보팀 차장

비행기가 성전기사단의 근거지였던 키프로스(싸이프러스)를 지나자, 낯선 터키어 안내방송이 곧 착륙을 알린다. 잠시 후면 나는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여 사흘간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돌아보는 짧은 여행을 시작한다. 중동은 우리에게 석유와 전쟁으로 익숙하지만 이집트, 페니키아와 같은 고대문명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발원지이다. 이러한 뿌리 깊은 역사적․종교적 배경으로 인해 이 지역은 세계사의 중심무대가 되었고 현재도 크고 작은 분쟁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땅을 직접 밟아보고 중동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한다는 기대감과 설레임,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을 안고 입국심사대 앞에 섰다.

 

예루살렘,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입국심사를 의외로 순조롭게 통과하여 예루살렘행 미니버스에 몸을 실었다. 예루살렘 외곽을 지나 시내에 들어서자 저 멀리 예루살렘성의 상징인 황금돔이 눈에 들어온다. 유대민족의 바빌론 유수, 로마에 대한 저항, 예수의 처형과 그리스도교 공인, 이슬람의 3대 성지,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를 외치며 전 유럽을 열광케 한 십자군의 최종목적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역사속 사건들이 머릿속에 스치면서 나는 다마스커스 게이트(Damascus Gate)앞에 내렸다.

다마스커스 게이트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아랍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랍상인들의 호객소리와 어우러져 여기가 아랍인 구역이라는 것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루살렘성은 UN의 중재하에 그리스도, 유대, 아랍, 아르메니아 4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스도 구역은 예수님의 무덤위에 세운 성묘교회를 중심이며, 유대구역은 통곡의 벽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구역간의 이동은 특별한 제한이 없다.

나는 자파 게이트(Jaffa Gate) 근처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를 찾아 나섰다.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의 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빌라도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약 800m의 길을 말한다. 이 길에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14개의 지점이 있다.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는 제1지점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은 빌라도 재판정으로, 이 곳에서 심문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확정되었다. 제2지점은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이다. 제3지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제4지점은 예수가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만난 곳이다. 제5지점은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대신 진 곳이다. 제6지점은 베로니카 여인이 물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제7지점은 기둥에 표시 되어 있으며,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당시에는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고 한다. 제8지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신 곳이다.

제9지점은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제10지점, 십자가에 못박힌 제11지점, 십자가위에서 운명하신 제12지점, 시신을 내려놓은 제13지점, 장사를 재낸 제14지점은 처형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안에 있다. 이 길은 전세계의 순례객으로 항상 붐비고 있으며, 각 지점 마다 표시가 되어있어 집중하여 찾는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제9지점의 위치는 약간 복잡함으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비아 돌로로사는 그리스도교에겐 예루살렘 순례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이지만 옷가게, 정육점, 식품점, 선물용품점으로 둘러싸여 우리나라 남대문을 연상케하는 시장골목으로 되어 있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라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순례객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나에게도 그들의 깊은 신앙심 앞에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비아 돌로로사의 종착지인 성묘교회를 뒤로 하고 나는 우리에게 ‘통곡의 벽’으로 잘 알려진 서쪽벽(Weterm Wall)로 향했다. 이 곳은 유대민족의 신앙의 상징이자 전세계 유대인의 순례지이다. BC 20년 헤롯왕은 여기에 신전을 지었으나, 유대인들이 로마에 두 번의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보복의 결과로 처참하게 파괴됐다. 통곡의 벽은 그때 파괴되지 않고 남은 성전 서쪽 벽을 가르킨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며 울었고 이에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현재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거룩한 장소이다. 국가적인 큰 행사들이 이곳에서 개최되며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다. 통곡의 벽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요르단측에 속하였었다. 그러나 1967년 6월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차지해 이스라엘에 속하게 됐다. 입장하기 위해서는 유대교도들이 쓰는 모자(키파)를 써야 하며, 무료로 대여해 준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경전인 토라를 읽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들의 역사와 아픔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이튿날 나는 겟세마네 동산과 만국교회로 유명한 올리브산을 돌아본 후 이슬람 사원 구역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이슬람 성소가 있다. 알 아크사 사원과 ‘황금돔 사원’(Dome of the Rock)이다.  과거 유대왕국 당시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다는 ‘사원 산’(Temple Mount)에 서 있다. 아랍인들은 ‘사원 산’을 ‘하람 알 샤리프’(고귀한 성소)라고 부른다. ‘하람 알 샤리프’ 한 복판에 서있는 돔 사원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를 받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때 지상에서 승천한 지점이라고 하며, 알 아크사 사원은 돔 사원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슬람의 3대 성지다. 하지만 발길을 급히 서둘렀음에도 출입시간 제한 때문에 입장하지 못하였다. 진한 아쉬움을 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황금돔 사원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품고 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빠듯한 일정때문이지만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였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멀어져가는 예루살렘성을 뒤로하고 공항에 도착하여 요르단 제라쉬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동속 또 하나의 로마 제라쉬

요르단 퀸 알리아 공항에서 내려 로마유적으로 유명한 제라쉬로 발길을 서둘렀다. 요르단하면 영화 ‘인디애나존스’ 촬영지인 페트라라는 유적지가 대표적으로 떠오르지만 나의 일정상 페트라에 가기에는 무리였다. 제라쉬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서북쪽으로 약50km 떨어져있는 제라쉬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면서 도시로 성장하다가,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장군인 폼페이에게 다시 정복되면서 로마의 속주가 된다. 이 후 로마제국의 동방 거점으로 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번성하다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726년 지진으로 도시가 함몰되면서 잊혀졌다가, 19세기부터 시작된 발굴작업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마시대의 거대한 열주와 광장, 전차경기장, 신전, 대형목욕탕, 원형극장 등 로마 도시의 흔적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문화 유적으로서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제라쉬 유적지는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으로 시작한다. 이문을 통과해 조금 가면 전차경기장이 나오는데 현재도 당시경기를 재현하는 공연을 하고 있다. 경기장을 지나 좀 더 올라가자 오벌포럼(타원형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광장둘레를 따라 이오니아식 기둥들이 서있고 이를 수평보들이 연결하고 있다. 광장 한복판에 서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마치 2000년천 로마시대로 빨려들어가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다. 광장을 지나면 남북을 가로지는 ‘카르도 막시무스’길(석주기둥길)이 시작된다. 북부원형극장까지 800미터 뻗어있는 이 길은 마차가 달리던 홈이 남아있고 배수시설도 군데군데 보인다. 양쪽 길가에는 석주기둥들이 줄서 있는데 아까와는 달리 화려한 코린트양식이다. 그 조각솜씨에 가히 혀를 내두를만했다. 로마의 정취를 한껏 만끽하며 길 끝에 다 다르니 로마원형극장(제라쉬에는 북쪽과 남쪽 2개의 원형극장이 있다)이 눈에 들어온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 객석에 잠시 앉아 2000년전 이 자리에서 공연을 즐기며 울고 웃었을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아쉬움이 짙게 남았지만 짧은 일정 때문에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야만 했다. 제라쉬는 원형극장과 전차경기장, 열주들이 늘어선 거리, 각종 신전, 수로시설등이 갖추어진 대규모 고대유적이다. 아직 절반도 안되게 발굴작업이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크기와 훌륭한 보존상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현재도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유적들이 파괴된 채 한을 품고 잠자고 있는 현장이었고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곳이었다.

제라쉬를 뒤로하고 귀국을 위해 두바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발원지이고, 이슬람교의 성지이지만, 전쟁과 파괴가 반복된 불운한 도시인 예루살렘과 중동속 또 하나의 로마인 제라쉬를 직접 돌아본 짧지만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핵무기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이란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종교적 대립과 갈등보다는 우리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