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주유소 허와 실

 

11월 15일 마감된 알뜰주유소 공급자 입찰이 유찰됐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정유3사가 정부의 알뜰주유소 공동구매 입찰에 참여했지만 정부가 원하는 가격과는 차이가 컸다. 입찰이라는 형식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격 경쟁이 되진 않았다.


정유사들이 입찰가를 얼마로 써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는 바로 재입찰하겠다고 밝혔지만 그마저 미뤄지면서 정부의 알뜰주유소 구상이 처음부터 삐걱대고 있다. 예정대로 다음 달 중순 알뜰주유소가 출범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여기에 1차 입찰이 무산된 이후 알뜰주유소로 전환하겠다고 한 주유소들은 이탈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급원 확정이 지연되면서 공급처 확보마저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입찰에서 유찰까지 그리고 재입찰

 
막판까지 참여 여부와 입찰가를 고심한 정유 3사는 15일 오후 3시 마감 직전에 입찰 관련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오일뱅크는 물량 공급과 기존 거래처와의 관계 등을 문제로 들어 입찰 마감 전인 11월 9일 일찌감치 불참을 선언하고 빠졌다.
11월 3일 입찰을 공고한 후 마감까지는 12일이 걸렸지만 마감 후 유찰이 결정되는 데는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정부가 원하는 선이 명확했고, 정유사들이 써낸 입찰가와 차이가 컸다는 의미다.


지식경제부는 이날 오후 5시가 넘은 시각 한국석유공사와 농협중앙회가 알뜰주유소에 휘발유를 공급하는 공동구매 입찰에서 낙찰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2차 입찰을 진행할 예정이지만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며 “정부는 싼 가격에 사길 원하고 정유사는 비싼 가격에 기름을 공급하기를 바라는 만큼 한 번의 입찰로 결론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석유공사와 농협 측은 이날 입찰가를 확인한 후 정유사들에 2번 정도 가격 재고를 요청했지만 결국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찰이라는 결과를 통해 일단 1차 입찰은 정부의 기름 값 인하 대책에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보고 기름을 공급할 수는 없다는 정유사들의 입장을 확인한 셈이 됐다.


지식경제부는 이날 바로 2차 입찰을 예고했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입찰을 계속 진행해 알뜰주유소에 휘발유를 공급할 국내 정유사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한 정유사들 속사정은
 

정부는 정유사로부터 휘발유와 경유를 대량으로 공동구매한 뒤 시중가보다 ℓ당 70~100원 싼 값에 파는 알뜰주유소 보급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름을 공급할 정유사들은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한편으로 보면 내수 공급 물량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일반 주유소보다 ℓ당 50원 가량 싼 가격을 원하는 만큼 매출이 늘어도 수익성을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국내 정유시장에서의 이익률도 높지 않은데다 기존 자사 상표를 단 주유소나 대리점들의 반발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지만 정유사 입장에서 출혈까지 감수할 순 없다”며 “상반기 기름 값 할인이 미친 충격이 컸던 만큼 조심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오일뱅크도 입찰 불참을 선언하며 “한 적도 없는 담합 때문에 1000억 과징금을 내고 상반기 ℓ당 100원 할인으로 1000억 원의 손실을 봤다”고 털어놓았다. 정부가 알뜰주유소에서 시중가보다 ℓ당 70~100원 싼 값에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잡은 만큼 정유사들에 40~50원 가량 인하된 가격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통휘발유 기준, 유통비용 및 마진은 ℓ당 100원 안팎이다.


현대오일뱅크가 불참을 결정한 또 다른 이유는 “기존 거래 주유소나 대리점에 피해가 가고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주유소협회 관계자는 “기존 주유소들의 경우 아무리 비용절감을 한다 해도 ℓ당 50원을 할인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며 “공정하지 않은 경쟁으로, 알뜰주유소 운영 방식 자체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급원뿐 아니라 공급처도 불안

 
유찰 일주일 후인 11월22일로 예정됐던 재입찰 일정도 잠정 연기됐다. 이에 한국석유공사와 농협이 어렵게 공급 정유사를 정한다 해도 이 기름을 사줄 알뜰주유소 확보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입찰 일정이 차질을 빚으면서 알뜰주유소로 전환하겠다고 한 주유소들도 발을 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경제부는 원래 농협의 직영 NH주유소 300여 곳 외에 기존 정유사와 계약해 운영하고 있는 200여 곳의 농협주유소, 무폴 주유소 50여 곳,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의 167개 주유소 중 50여 곳을 알뜰주유소로 전환해갈 계획이었다. 여기에 사회공헌형 주유소와 남은 600여 곳의 무폴 주유소, 100여 곳의 고속도로 휴게소 주유소 등으로 확대해 2015년까지 1300개를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북도 한 고속도로 주유소 관계자는 “참여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라며 “원래 11월 초까지 참여여부를 결정하라고 했는데 참여업체가 적어서 그런지 제출 기한이 11월 말로 연장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알뜰주유소로 전환을 결정했던 강원도의 한 고속도로 주유소 관계자는 “5, 60원 정도 싸게 팔면 마진은 줄어도 손님을 많이 끌 수 있을 것 같아 참여를 결정했다”면서도 “간판이나 인테리어, 카드 단말기까지 모든 걸 바꿔야 하는데 입찰이 늦어져 연말까지 전환이 가능할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번 입찰은 물량을 정하지 않고 공급가격만 정하는 단가계약이다. 공급 물량을 정해두지 않고 일정 기간을 특정 가격으로 받는 것이다. 이에 정부도 알뜰주유소 확대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알뜰주유소 공급물량이 국내 전체 수요의 4~5%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훨씬 못 미칠 것”이라며 “가격 인하 정도와 효과를 보고 참여하려는 주유소들이 많을 텐데 시작부터 이렇다면 누가 나서겠냐”고 반문했다.
 

 

다시 원점에서 현실적인 대책 고민 필요

 
정부는 2015년까지 알뜰주유소 1300개라는 숫자를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상반기 3개월 간 ℓ당 100원 인하의 충격이 컸던 만큼 재입찰이 계속돼도 정부가 만족할 만한 가격을 제시할 정유사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각에서 “이미 원하는 가격을 다 정해놓았는데 입찰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결국엔 입찰과 유찰을 반복하면서 정유사들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여갈 것”이라는 불만도 나온다.

 
지식경제부는 알뜰주유소 공동구매 무산과 더불어 공급의 다변화를 위해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외국 정유사를 통한 석유제품 수입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은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를 통해 “알뜰주유소 휘발유 구입 입찰에 정유사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일본에서 기름을 들여오는 방안도 검토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름 값 문제를 기한과 규모를 정해놓고 단기간에 무조건 만들어놓은 틀에 맞추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서민경제와 맞물려 규모가 크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알뜰주유소의 가격 인하 방식이나 효과, 기존 주유소와의 형평성 문제까지 어떻게 해결할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이 필요하다.

일본 등 인근 지역에서 석유제품을 수입하는 방안도 선심성 대책을 넘어 현실성을 가지려면 물류비용을 얼마나 낮춰 기름 값에 반영시킬 수 있을지, 수입이 가능하도록 환경기준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