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초월한 비극적 사랑, 미스 사이공

글 | 박진영_작가
‘이코노미세계‘‘위클리경향’등 문화에디터로 활동

"그댄 해살 난 달빛/ 운명이 맺은 우리/ 하늘을 함께 나눠 갖네"

베트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5년 4월 사이공, 미군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자를 살 수 있는 클럽에서 미국 병사 크리스는 가족들의 죽음을 계기로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게 된 17세의 베트남 소녀 킴과 운명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극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나이트클럽 '드림랜드'는 여성들이 춤과 몸을 팔며 병사들을 전쟁의 '악몽'에서 눈을 감게 하는 공간, 술과 약에 취해 흥청망청하는 미국 병사와 바걸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수줍은 처녀 킴과 크리스의 만남을 도드라지게 한다. 여성들을 돈벌이에 이용하면서도 언젠가 미국으로 떠날 희망을 품은 엔지니어의 꿈이 바스라지면서 '드림랜드'도 흉물로 변한다. 그 공간이 전쟁이 남긴 사생아의 은신처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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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의 기운이 무르익은 사이공에서 미국은 철수 준비에 여념이 없고, 크리스는 킴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 한 자루를 맡기고 대사관 일을 보러간다. 대사관에 온 크리스는 킴을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절류하지만, 굳게 닫힌 대사관 문은 둘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귀국한 크리스는 킴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악몽에 시달리지만, 상처를 보듬은 여인 엘 렌을 만나 베트남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미스 사이공은...

운명적 만남과 헤어짐, 아이를 향한 모성과 살인, 그리고 자살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에 더해진 감미롭고 중독성 강한 뮤지컬로서, 2006년 초연 당시 아쉬웠던 점으로 지적된 가사 전달의 부자연스러움을 4년간의 수정작업을 거친 완벽한 가사와 초연 당시 제반 여건으로 인하여 시도할 수 없었던 캐딜락 세트를 무대 위에 볼 수 있다. 1950년대 베트남전 당시 운행되었던 실제 캐딜락과 똑같은 모델로서 실질적인 주인공 엔지니어의 아메리칸 드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로서 극중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1989년 런던 초연 후 지금까지 26개국 317개 도시에서 13개 언어로 공연되는 기록도 갖고 있다.

3년이 지나 1978년 킴은 태국 방콕에서 크리스의 아들 탐과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부이도이'(베트남전쟁 중 미국인과 베트남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를 찾아 나선 단체에 의해 킴의 근황을 알게 된 크리스는 엘 렌과 함께 킴과 탐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킴은 크리스의 곁에 엘 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아들을 위해 크리스가 맡긴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198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4000회 이상 장기 공연 될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흥행작으로 꼽히는 미스 사이공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바탕으로 했다. 그래서 미 해군사간과 일본 게이샤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나비부인'과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재혼하지 않고 아들을 키우는 여인, 새 부인과 나타난 남편을 확인한 비련의 여인, 그리고 아들만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다. 미스 사이공 작사가 알랭 부브리가 밝힌 것처럼 킴과 크리스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로 '아메리카 드림'의 화신이자 기회주의자로 설정된 엔지니어는 '나비부인'에는 없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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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미국행 헬리콥터에 타기 위해 대사관 철조망을 넘으려는 베트남인들의 절규와 그 속에서 울부짖는 킴. 대사관 내에서 킴과 생이별해야 하는 크리스의 애틋함 등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택하는 킴이 수절하는 여성, 자식의 행복을 위해 생명까지 던지는 어머니로 그려졌기에 더욱 그렇다.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캣츠'와 함께 세계 4대 뮤지컬의 위용을 자랑하듯 매력적인 음악에 더해진 볼거리도 많았다. 포탄이 쏟아지는 베트남의 혼란함을 재현한 세트는 무대를 미끄러졌고, 베트콩이 사이공을 점령한 뒤 군사들이 보여주는 박력 있는 아크로배틱은 극에 활기를 더했다. 2막에서 영상으로 재현된 헬기는 병사들의 탈출을 자연스럽게 재현했고, 실제 캐딜락이 등장한 '아메리카 드림' 장면은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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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뮤지컬로만 보기에는 이 극이 담아낸 현실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전쟁이 남긴 사생아 '부이 도이(Bui-Doi)의 존재는 상처뿐인 전쟁에 대한 자아비판이다. 월남전 참전국인 우리에게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유물은 살아남은 이들의 삶을 후벼 판다. 갑작스런 미국의 비상 탈출과 크리스 아이의 출생으로 둘의 사랑은 시련으로 곤두박질친다. 킴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크리스가 남기고 떠난 미제 권총이다. 실패하는 사랑을 통해 이 극은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고발한다.

극의 마지막, 가장 좋은 옷을 입힌 아들에게 다정하게 키스를 건넨 킴은 커튼 뒤로 사라진다.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부서질 때 관객들의 심장도 멋었다. 킴이 악몽과도 같은 현실에서 아들을 구출해낼 길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방법뿐이었다.

<미스 사이공>은 서곡과 피날레를 비롯해 29곡의 노래 중 대표적인 사랑의 노래가 1막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크리스와 킴이 부르는 <해와 달 Sun and Moon>다. <미스 사이공>은 노래도 아름답지만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데 최대 명장면은 크리스가 미국으로 떠날 때 등장하는 헬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작비 절감을 위해 3D 영상으로 처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