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기록이 없는 나라?! 1973년 이전의 통치기록 상당수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단 폐기되거나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수석실에서 작성한 정책관련 조사 및 검토보고서도 대부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 기록이 ‘사료’로서의 갖는 의미를 감안하면 사실상 통치자들이 ‘기록이 없는 나라’를 조장해 왔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셈이다.」 얼마전 모 일간 신문에 난 기사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록을 중요시하는 민족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7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25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 , 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소상히 기록한 총 1893 888책의 실로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왕의 행차나 왕실의 경사 및 국가행사를 그림을 곁들여 가며 상세히 적어 놓은 의궤(儀軌) 또한 고급스러운 장정과 세밀한 묘사로 기록문화의 진수라 할 만하다.

사관은 사초(史草)를 바탕으로 임금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고 때로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과감하게 비판했다.

사관이 왕의 눈치를 보지않고 실록을 편찬할 수 있도록 임금은 전대의 실록을 전혀 볼 수 없도록 했다. 왕조실록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뒤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뤄지는데, 춘추관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에서 맡았다. 민간의 기록문화 또한 나라 것에 못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과 백의종군의 고뇌가 담긴 「난중일기」라던지 임진왜란의 자세한 내용을 담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김구 선생의 뜨거운 애국 혼이 깃든 「백범일지」가 바로 그것이다.

전란과 독립운동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선조들의 정신력이 놀랍다.

나라안 각지의 명문 종가가 간직하고 있는 선비들의 문집과 서한 또한 한국인들의 놀라운 기록문화의 전통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상들의 이 같은 기록열(記錄熱)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며 쇠퇴해 갔다. 엘리트 사관(史官) 2명으로부터 언행 하나하나를 감시당했던 왕들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독대(獨對)를 선호했다.

재임시 주요 정책 추진에 관한 알짜배기 문건은 일찌감치 소각 또는 폐기처리하거나 퇴임후 정치적 거래 등을 염두에 두고 사저로 가져갔다.

정부가 국가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정비에 나선 것은 광복 반세기가 지난 2000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나서다.

 

기록물 혁명을 가져온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直指)

중국경제가 강해지면서 중화(中華)사상의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특히 문화·역사적인 사안을 두고 우리나라와 마찰을 빚고 있다. 금속활자와 측우기를 중국이 먼저 발명했다고 우기더니 고구려를 중국역사의 일부라고 주장까지 하고 나섰다. 한 마디로 역사·문화전쟁이다. 금속활자

image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됐던 청주 흥덕사터에 「고인쇄박물관」이 세워져 ‘금속활자→디지털 문화’로 이어지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를 발명하기 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목판인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척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목판인쇄 발명 초기에는 다량의 책을 인쇄할 수 있어 가히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인쇄용 목판을 제작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었다. 나무를 베어서 다듬고 연판과정을 거쳐 판서본을 붙여 글자 하나하나를 새기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이런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한 벌의 활자를 만들어 보존만 잘하면 활자의 조합으로 필요한 책들을 손쉽게 인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활자를 최초로 창안한 것은 11세기초 북송의 필승이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는 찰흙으로 만든 것으로 파손이 심할 뿐더러 내구성이 떨어지고 글자체가 자주 일그러지곤 했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찰흙활자가 지닌 장점을 바탕으로 내구성이 강한 금속활자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금속활자인쇄는 서기 1200년 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기록만 있을 뿐이지 금속활자로 된 책은 없다. 그뒤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서기 1377년이다.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만든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즉 직지(直指). 「직지」의 판본은 흥덕사에서 인쇄된 금속활자본 1종과 취암사에서 나온 목판본 2종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흥덕사본은 고려 우왕 3(1377) 7월에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상하 2 2책이었으나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하권만이 제일 첫 장이 파손된 상태로 오늘까지 보관돼 있던 것을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박병선 여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image
▲세종때 만들어진 국한문본의 금속활자
image

▲독일의 구텐베르그가 만든 금속활자

특히 이 책은 조선조 말 프랑스의 침략당시 유출된 것으로 알려져, 유네스코법에 따라 약탈 문화재는 원래 현지로 돌려줘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동안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창안해 종교혁명을 가져왔다고 모두가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직지」가 발견됨으로써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무려 78년에서 1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져 금속활자발명의 시기는 논쟁에 휩싸였다. 결국 유엔교육과학기구(UNESCO)의 검정을 거쳐 「직지(直指)」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지구상의 교과서가 모두가 바뀌었다.

「직지」는 불교문화의 진수를 알려주는 견고한 금속활자본으로 된 책이다.

「직지」금속활자본 이래,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기술은 날로 발전, 조선조 세종이 즉위한 뒤 1420년에는 주조와 조판술이 크게 개량되었다. 1434년에는 인쇄술이 더욱 발전하여 세종은 천문기기를 제작하면서 크기가 각기 다른 활자를 동일한 크기로 만들고 정교한 판틀을 조립식으로 제작해 과학적인 인쇄술을 선보였다. 금속활자인쇄의 정교함과 예술성 등이 이때 절정에 이르렸다. 그뒤 한글 활자도 만들어져 국한문본의 혼용인쇄가 등장하기도 했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정교함, 예술성까지 빛을 발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와 세종 즉위때 완성된 금속활자본 책들이 문화적인 가치를 갖고 오늘날까지도 그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쇄·보관까지 늘 염두에 두고 완성한 책에는 세계기록문화유산 이상의 뜻과 유물로 여겼던 선조들의 지혜와 혜안이 오늘날 첨단 반도체 즉 디지탈문화를 낳지 않았을까!

드디어, 세계 인류문맹퇴치에 힘쓴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종대왕상이 유네스코에서 1989년에 제정되어 매년 주어져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직지상(直指賞:UNESCO Jikji Memory of the World Prize) 2004년 제정했다는 소식이다. 유네스코는 2년마다 한차례씩 청주시가 지정하는 ‘직지의 날’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자문위원회가 선정하는 수상자에게 3만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의 발명!

이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세계는 날로 첨단과학 디지탈문화혁명이 일고 있는 것은 부인못할 일이다.

image

※참고
유네스코가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제도 시행이래 우리나라는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 일기」 등 4종이 등재되어 세계기록문화유산 최다 등재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