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빠진 세계경제, 반성문은 어떻게 써야할까?
유병선 | 경향신문 논설위원
지난 2월 18일 뉴욕의 한 칵테일파티에서 있었던 일이다. 피터 만델슨 영국 산업장관은 기자들이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슐츠 회장이 서유럽 경제가 가장 걱정이고, 그 중에서도 영국 경제는 침체의 악순환에 빠졌다고 한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작위도 있는 만델슨 장관은 갑자기 기자들더러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내가 왜 그딴 녀석이 내 나라를 비난하는 것을 들어야 하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물론 만델슨 장관은 다분의 의도적인 ‘버럭 쇼’를 한 거였다. 금융위기로 신뢰가 무너진 시장은 사람들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는 이른바 ‘자기 실현적’ 공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경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성깔을 부린 셈이다. 그렇게 화를 내서 영국 경제가 나아질 수만 있다면 쇼를 하지 않을 지도자는 없을 터이다.
지난 3월 25일 영국 정부는 17억5천만 파운드어치의 국채를 경매에 부쳤다. 1억 파운드가 모자라 국채 발행이 무산됐다. 국제 채권시장에서 국채 경매가 유찰된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다. 영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조차 신뢰를 받지 못한 것이다. 30년 전인 1979년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총리 정부가 들어선 이래 미국과 더불어 신경제, 신자유주의의 쌍두마차였던 영국의 처지는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9월 15일 월가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후 세계 경제는 흥청망청에서 반성 모드로 급반전 했다. 미국은 요란했다. 20년 전 ‘역사의 종언’을 썼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 주식회사의 종언’이라는 종언 시리즈를 냈고, 뉴욕타임스는 이제 시장만능의 제단에서 내려와야 할 때라고 설파했다. 앨런 그린스펀을 비롯해 추앙받던 시장만능주의의 신도들이 줄줄이 회개의 반성문을 냈다. 감세와 작은 정부로 대표되는 레이거노믹스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지난 3월 19일 영국에서 미국에서처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주목할만한 반성문이 나왔다.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는 ‘진보적 보수주의’를 내세우며 전통적인 보수당으로부터 전향을 선언했다. 부유층의 세금을 올려야 한다며 감세론을 버렸고, 보수당이 더 공평한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며 사회 정의를 끌어안았다. ‘개인만 있고 사회는 없다’며 시장만능으로 내달렸던 보수당의 금과옥조, ‘대처주의’가 영국 보수당 내부에서 와해되고 있다는 뜻이다.
빅팟 경제의 파탄
뭐가 잘못된 것일까? 잇따르는 반성문과 국내 한 은행의 광고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2년 전 한 시중은행은 신상품 광고에 예술품을 끌어들이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프랑스 출신 현대 조형미술계 거장인 장 피에르 레이노의 붉은색 대형 화분을 내세우고 “크다!”란 간결한 헤드카피를 달았다. ‘빅팟’(Big Pot)광고다. 요컨대 큰 것이 아름답고, 빈익빈부익부는 당연하다는 직설화법의 광고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세태에서 더 많은 재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의 예술작품만큼 금융기관의 광고 소재로 매력적인 것도 달리 없을 듯싶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반성문 필자들이 반성하는 대목이 바로 빅팟이라는 점이다.
빅팟이 점점 커질수록 주변은 점점 말라간다. 빅팟 광고는 대처와 레이건이 불가침의 원리로 내세웠던 ‘낙수이론’(trickle down)이 작동불능임을 드러낸다. 돈을 많이 버는 대기업과 부자들이 많아야 경제가 발전하고, 그들의 세금을 깎아 줘야 투자가 늘어 성장하면서 물이 아래로 흐르듯 주변을 적시면서 자연스럽게 부의 분배가 이뤄진다는 게 낙수이론이다. 적하이론이 지탱되려면 큰 그릇에서 주변을 적실만큼 흘러 내려야 한다. 빅팟 광고는 낙수이론을 선전하면서 동시에 낙수이론의 허구를 까발린다.
빅팟이 커질수록 중산층은 가난해진다. KDI가 산출한 소득계층별 비중을 보면 1996년 68.7%이던 중산층이 2007년 57.6%로 줄었다.
이 기간 빈곤층은 6.7%, 상류층은 4.4% 각각 늘었다. IMF를 겪으면서 중산층 10명 가운데 4명은 올라가고 7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양극화가 진행된 셈이다. 소득격차는 점점 커지고, 정체되었던 실질 가계소득은 지난해 4·4분기에 급기야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우리만이 아니다. 부자들의 그릇은 커지는데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1년 예산 만큼의 구제금융을 받은 AIG의 보너스 잔치에 미국인들이 그토록 공분하는 현실은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반부자정서 때문이 아니라 고착화된 소득불균형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주변을 적시지 못하는 불임의 시스템, ‘빅팟 경제’(Big Pot Economy)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바라보며 펴낸 책 ‘위기 그리고 그 이후’에서 위기의 실체를 이렇게 한 줄로 압축한다. “세계화 이후 최초로 맞게 된 이번 금융위기는, 상당부분 미국 사회가 중산층에게 적절한 수준의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아탈리도 진단을 달리 말하자면, 지금의 위기는 중산층을 가난하게 만드는 빅팟 경제의 예고된 파국이라고 할 수 있다. 소득불균형을 방치한 채 실물과 유리된 금융은 부실로 부실을 쌓아 올리며 빅팟을 키웠고, 주변이 말라버리자 맥없이 무너진 꼴이다.
낙수 경제에서 분수 경제로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상무차관을 지낸 예일 대학교 국제무역·금융분과 석좌교수 제프리 가튼(Jeffrey Garten) 교수는 미국이 경제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국내적으로는 소득 격차부터 손대야 하고, 국제적으로는 금융·무역 불균형을 줄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4월2일 영국 런던에서 세계 경제 위기의 책임을 물어 ‘G20 정상회의’를 ‘G20 붕괴’(meltdown)라고 한 것도 그래서이다. ‘달러의 위기’를 쓴 미국 금융분석가 리처드 던컨은 지구촌의 불황 탈출을 위한 해법은 ‘분수(trickle up)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본디 영어 ‘trickle’은 아래로 흐른다는 뜻인 만큼 뒤에 아래로(down)가 오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위로(up)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던컨이 굳이 분수 이론이란 조어를 내세운 것은 금과옥조로 여겼던 낙수이론을 폐기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위에서 주변을 적시는 경제는 작동하지도 않을뿐더러, 이제는 빈곤층과 서민, 중산층에게 공정한 분배를 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커진 소비여력이 부자들과 국가의 부로 퍼져 올라가는 역발상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빅팟 경제의 파탄에서 벗어나는 해법은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드는 낙수 전략 대신 서민과 중산층의 소득을 늘려주는 분수 전략에 있다는 것이고, 그래야 세계 경제의 지속가능성이 회복된다는 얘기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지지자들이 내세운 구호가 ‘분수 경제학’(trickle up economics)이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부자 증세, 서민 감세’의 경기부양책과 사회안전망 확충에 나서고 있다.
분수 경제학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미래로 재조명 받고 있는 북유럽의 혼합경제 모델이 분수 이론 전략인 셈이다. 시장의 역동성을 수용하면서도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불균형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교정하는 방식이다. 시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낙수이론만 붙잡는 게 아니라 빅팟을 향한 질주를 차단하고, 아래로부터 부가 올라올 수 있게 한다.
지난 3월23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중산층을 살려야 한다며 ‘휴먼 뉴딜’을 발표했다. 날로 가난해지며 붕괴되고 있는 중산층의 위기를 생각한다면 때 늦은 것이지만, 이제라도 현실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공감할만한 방향설정이다. 문제는 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중산층을 두텁게 할 것인가이다. 부자의 세금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리며, 초임 월급을 깎는 낡은 빅팟경제학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계속 짜게 먹으면서 신장병을 고칠 수는 없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고리타분한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다. ‘낙수’를 버리고 ‘분수’로 가야 한다.